*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대의 경제
1. 개항과 무역 확대
1) 1870~80년대 무역
ㄱ. 1870년대 : 개항장에서는 감리서, 개항장 경무서, 개항장 재판소를 두고, 최고 행정관인 감리가 개항장을 관리하였습니다. 영사 사무 관계가 많은 개항장에는 각국이 영사관을 두어 자기 나라의 권익 확보와 보호에 힘썼는데 이곳은 외국인에 대해 국내법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또 조약에는 관세 부과에 관한 규정이 없었으며, 거래에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개항 초기에는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 10리 안에 한정되어 보부상과 같은 조선 상인이 이를 사서 개항장의 조선인 객주, 여각에게 넘기면 일본 무역 상인들이 그것을 사서 일본으로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개항장을 통하여 쌀, 콩, 쇠가죽 등을 주로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영국제 섬유류를 주로 수입하였습니다. 외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고, 국내의 곡물이 대량으로 수출되는 무역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한편 1876년 부산에 사설 제일은행이 설립되었다가 1878년 국립 제일은행 지점이 설치되었습니다.
ㄴ. 1880년대 : 개항 초기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본과 청국 상인은 내륙 통상이 허용되자 1890년 무렵부터는 내륙으로 들어가 생산지나 포구의 객주와 직접 거래하거나 객주를 포함하여 농촌 소상인까지 장악해 나갔습니다. 일본인의 활동 범위가 1884년에는 개항장 밖 100리로 확대되었고, 1885년부터 외국인의 내륙 지방 여행이 허가되어 일본 상인들이 생산지에 가서 곡물을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 상인은 일본산 면제품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공산품을 들여왔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여 외국 상인이 서울에 점포를 열고 국내 곳곳을 다니며 영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청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되면서, 조선과 청의 무역 규모는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 규모에 육박할 만큼 급성장을 보였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주로 인삼과 해산물을 수출하고 영국제 면제품을 사들였습니다.
2) 경제 변화
ㄱ. 국내 경제 : 값싼 외국산 면제품은 가내 수공업 위주로 이루어진 국내의 면공업 발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고, 이에 따라 농민의 수입도 줄어들었습니다. 또 일본으로 쌀의 유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쌀 부족과 쌀값 이산에 따른 전반적인 물가 인상이 나타나 도시나 농촌의 가난한 사람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일부 지주와 상인은 쌀 수출에 적극 가담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고, 이를 다시 토지 매입에 투자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토지를 획득함으로써 대지주로 성장해 갔습니다.
ㄴ. 토착 상인 : 청나라와 일본 상인이 서울 시장에 침투하여 수입품만이 아니라 시전 상인의 전매 품종인 백목면, 명태 등의 국내 생산품까지 취급하였습니다. 상권을 침해 받은 시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 점포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맹 철시를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공인들은 개항 후 근대적 상인으로 변모하지 못하고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정부에 대한 조달 이외에 다른 상로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강 상인은 개항 후 세곡 운반이 일본인 증기선에 독점됨으로써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일부 상인은 증기선을 구입하여 이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평양 상인은 개항 초기부터 수출입 상품의 유통에 종사했으나 평양이 개시장이 되고 남포가 개항된 후에는 일본 상인에게 상권을 침탈당했습니다.
3) 경제 자립 노력
ㄱ. 무역 구조 개선 : 조선 정부는 약탈적 무역 구조를 시정하고 경제 자립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1882년 미국과의 통상 조약과 1883년에 발표된 '조일 통상 장정' 및 '해세세칙'에서는 어느 정도 관세 자주권과 곡물 수출 금지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ㄴ. 상회사 : 정부는 국내 상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업 조합으로서 상회사를 건립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관료와 객주 및 일반 상인이 참여한 상회사는 평양의 대동 상회, 서울의 장통 상회를 비롯하여 30여 개에 달했는데, 이들은 영업의 독점권과 세금 징수권을 정부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 운송 기능을 근대화하기 위해 기선 회사, 이운사 등 관영 운송 회사를 설립하여 세곡 운반을 전담시켰습니다.
ㄷ. 상인 보호
a. 혜상공국(1883) : 영세 상인인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혜상공국을 설치하였습니다.
b. 상리국(1885) : 보부상이 어용 독점 행상으로서 권한을 갖게 되자 보부상을 남침하며 폐단을 일으키는 무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보부상으로 일어나는 폐단을 척결하기 위해 혜상공국은 상리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ㄹ. 방곡령 : 1883년 조일 통상 장정을 체결하여 국내 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 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89년과 1890년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과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실시한 방곡령은 일본의 압력을 받은 정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그대로 강행하여 외교적인 마찰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두 지방의 방곡령은 일본 측의 강력한 항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측에 11만 원의 배상금을 물어주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방곡령은 이후에도 부분족으로 시행되다가 1894년 1월에 전면 해제되었습니다.
2. 열강의 경제 침투 확대와 대응
1) 청일 전쟁 : 1890년대 전반까지 수입 면제품의 대종을 이룬 영국산은 일반 소비자로부터 별로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방직업은 한국의 전통 면포를 연구하여 유사한 제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양질의 값싼 면제품이 대량으로 들어오자 한국의 전통 면직업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또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개항장 주변에서 외국인의 토지 침탈이 강화되었습니다. 곡창 지대 특히 곡물의 운송과 유통이 편리한 지역의 토지를 대상으로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외국 상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의 몰락이 가속화되었습니다.
2) 아관파천 : 1896년에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자,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최혜국 조항은 구미 열강이 이권을 침탈하는 중요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최혜국 조항이란 조선 정부가 한 나라에게 경제 이권을 넘겨주면 다른 나라에게도 기회균등의 차원에서 같은 수준의 이권을 주어야 한다는 불평등한 조항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재정, 군사 고문으로 앉히고 경원, 종성의 광산 채굴권이나 압록강, 울릉도 삼림 벌채권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국은 황실과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 등을 앞세워 당시 조선 전체 금 생산량의 약 1/4을 생산하던 운산 금광 개발권을 비롯하여 경인선 철도 부설권과 서울 시내 전기, 수도 시설권, 서울 전차 부설권을 차지했습니다. 영국에는 은산 금광 채굴권, 독일에는 강원도 당현 금광 채굴권, 프랑스에는 경의 철도 부설권과 창성 금광 채굴권을 각각 양도하였습니다. 일본은 경부선 철도 부설권, 경인선 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 매입), 직산 금광 채굴권 등을 차지하였습니다.
3) 식산흥업과 상권 수호 운동 : 대한제국기에 들어 외세의 경제 침탈을 막고 근대적인 국민 경제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정치 및 행정을 맡은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식산흥업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정부는 화폐 제도 개혁과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전, 현직 관리와 민간의 자본을 모아 근대적 기업 설립에 나섰습니다. 산업 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 설립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민간에서는 농기구나 일용품을 만들던 철기 및 유기 제조업, 정미업, 직포 공업 등에서 공장을 늘리고 새로운 기계를 외국에서 들여오거나, 자본을 모아 합자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자본의 성장으로 대한협동우선회사, 인천우선회사, 인한윤선주식회사 등 비교적 큰 규모의 해운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이운사, 통운사 같은 육운회사, 부하철도회사, 대한철도회사, 영남지선철도회사 등 철도회사가, 해서철광해서, 수안금광합자회사 등 광업 회사도 설립되었습니다.
광무 년간에 민족기업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방직업이었습니다. 안경수가 주동이 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 종로의 백목전, 상인이 중심이 된 종로 직조사 그리고 김덕창이 구식 공장을 근대식으로 개조한 김덕창 직조공장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최초로 설립된 조선은행은 관료 자본 중심으로 설립된 은행으로서 국고 출납 업무를 대행하고 지방 중요 도시에 지점을 두었으나 곧 폐쇄되었습니다. 한성은행, 천일은행 등 몇 개의 민간은행이 설립되었는데, 대부분 관료 자본과 상업 자본의 합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 상권 수호 운동 : 독립협회나 황국중앙총상회 등과 같은 단체도 국내 산업 진흥과 상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외국의 이권 탈취 및 경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황국종상총상회는 종래의 금난전권을 잃은 시전 상인들이 대한 제국 시기에 와서 외국상인의 침입에 맞서 상권을 지키기 위해 발족한 상인단체였습니다. 이들은 독립협회의 정치 활동에 동조하여 철시를 단행하기도 하면서 상권 수호 운동을 적극 펴나갔습니다. 그러나 황국중앙총상회가 독립협회와 정부에 의해 해체됨으로써 시전 상인들의 상권 수호 운동은 좌절되었습니다. 그 후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의 결과로 빚어진 금융 공황 때문에 큰 타격을 입은 시전 상인들 중심으로 한성상업회의소가 조직되었습니다.
정부와 민간의 식산흥업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자본의 축적과 근대적 금융 제도를 확립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 일제의 침략으로 식산흥업 노력은 좌절되었습니다.
3. 일제의 경제적 예속화와 경제 구국 운동
1) 일제의 경제 예속화
ㄱ. 금융 : 러, 일 전쟁 중에 일제는 일본일을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후 일제는 국가의 모든 수입과 지출 과정을 장악하였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금융을 지배하기 위해 1904년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의 지휘하에 구화폐 정기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05년 7월부터 그동안 사용하던 새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하게 하였습니다. 또 대한 제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인을 위한 여러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빌어 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905년에 300만 엔의 차관을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10년에는 그 액수가 4500만 엔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ㄴ. 토지 약탈 : 일제는 러, 일 전쟁 중에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국유지나 황실 소유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이후 여러 가지 구실로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내세워 일본인이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2) 경제적 구국 운동
ㄱ. 토지 약탈 저지 : 러, 일 전쟁 때 일제가 황무지 개간을 구실로 막대한 국유지를 빼앗으려 하자, 보안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투쟁이 일어나 이 요구를 좌절시켰습니다. 또 중추원 부의장 이도재, 장례원경 김종한 등이 주동이 되어 황무지 개척 사업을 목적으로 농광회사를 설립하고 궁내부와 농상공부에 특허를 청원하였습니다.
ㄴ. 회사 설립 : 1905년 이후에 일제 침략이 강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회사 설립과 인재 육성에 나선 이들이 많았습니다.
ㄷ. 국채 보상 운동 : 1907년에는 국민 모금으로 정부가 진 빚을 갚아서 경제 자립과 국권 수호를 이룩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구에서 서상동과 김광제가 시작하였으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이나, 비녀와 가락지 같은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을 성금으로 내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 기관이 필요해짐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하고, 한규설, 양기탁 등 임원을 설출하였으나 일본 통감부의 방해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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