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경제, 사회적 민족 운동


 1. 경제
 1) 민족 기업 : 일제의 각종 규제로 민족 기업 활동은 큰 회사의 설립보다는 오히려 소규모 공장 건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한국인이 경영한 기업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인 대자본과 경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기업 활동은 경쟁이 심하지 않은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거나, 가내 수공업과 연계를 맺으면서 중소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민족 기업은 순수한 한국인만으로 운영되었으며, 한국인의 기호에 맞게 내구성이 강하고 무게 있는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 유형으로는 지주 출신의 기업인이 지주와 상인의 자본을 모아 대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서민 출신의 상인들이 자본을 모아 대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지주 출신 공장으로는 경성 방직 주식회사가 있고 서민 출신 공장으로는 평양 메리야스 공장이 있습니다.
 한국인 기업 활동이 활발해서인지,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민족 기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 식민 통치 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의 교묘한 탄압으로 해체되거나, 일본인 기업에 흡수, 통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족 기업의 운동은 1920년대에 비하여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ㄱ. 대두 : 일제 강점기에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기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쌀의 반출을 위해 지주를 지원하고, 일본 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농민과 노동자는 소작 쟁의나 노동 쟁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생존권 투쟁이자 경제적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강화해 간 노동자와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킬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초기 노동자, 농민 단체는 지식인이나 자본가, 지주 등도 함께 참여하여 대개 상호 부조직인 계몽적 단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4월에는 최초의 전국적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었고, 노동공제회가 해체된 이후인 1922년 10월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계급적 목표를 분명히 한 조선노동연맹회가 조직되었습니다.
 * 조선노농총동맹(1924. 4) : 전국 260여 개의 노동자, 농민 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여 '철저히 자본가 계급과 투쟁한다.'라는 강령을 내걸었습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전국 노동자, 농민 단체를 거의 망라한 점에서 민중 운동의 큰 진전이었습니다. 다만 계급적 처지와 입장을 달리하는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이 분화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노동자 단체와 농민 단체의 분리를 모색하여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시켰습니다.

 ㄴ. 노동 운동 : 191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아주 적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습니다.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정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태동기(1920~24년) : 초기에는 주로 임금 임하 반대와 임금 인상 요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23년 이후에는 임금 인상 외에도 단체협약권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악질 일본인 감독의 추방, 노동 조건의 개선 등 다양한 요구 조건이 제시되었습니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주로 정미업, 고무업, 양말업 등 비교적 규모가 작은 공장과 공장이 몰려 있던 경기도, 경상남도,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본격화(1925~29년) : 1920년대 후반기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참가 인원도 늘고 파업 지역도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쟁의는 목포 제유공 파업(1925), 영흥 노동자 총파업(1928),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 등입니다.
 * 원산 노동자 총파업 :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1928년 9월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 있던 라이징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총파업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뒤 이 지역의 상급 노동 단체인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절정기(1930~36년경) :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북부 지방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 수도 빠르게 늘어나, 1943년에는 100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더욱 인하하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였으며, 각종 부담금을 강제로 징수하였습니다.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노동쟁의에 대한 통제 또한 크게 강화하였습니다. 일제가 합법적인 운동마저 탄압하자 노동자들은 비합법적 투쟁에 나섰고,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이었습니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은 서울, 원산, 함흥 등 북부 공업 지대를 비롯하여 신의주, 평양, 마산, 부산 등 전국의 공업 지대를 중심으로 바르게 퍼져 갔습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지는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노동조합은 강제 해산되고, 노동 운동은 잠복기에 들어갔습니다.

 ㄷ. 농민 운동 : 러일 전쟁 후, 일본인은 본격적으로 한국에 건너와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한편,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이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한국인 지주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얻은 부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소직 농민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지주가 물어야 할 지세 부담까지 떠맡았고, 마름의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더욱이 소작인은 1년을 기한으로 하는 소작 계약을 강요당하여 생존권마저 위협받았습니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 의식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소잭 쟁의가 발생하였습니다.

 태동기(1920~24) : 농민 운동은 소작인 조합이 중심이 된 소작농의 대지주 항쟁, 즉 소작 쟁의로 펼쳐졌습니다. 소작 쟁의의 목적은 초기에는 주로 소작료 인하에 있었지만, 1923년경부터는 압도적 다수의 쟁의가 소작권 이동 반대 투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암태도 소작 쟁의와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 쟁의(1924)가 규모가 큰 것입니다.

 본격화(1925~29) : 소작인 조합이 농민 조합으로 개편되어 자작농까지 포함하는 보다 대중적인 조직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농민 운동도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 쟁의만이 아니라 수리 조합 등 일제의 경제적 약탈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아갔습니다. 대표적인 농민 운동은 전남 무안군 자은도 소작 쟁의(1925), 전남 구례 농민의 수리조합 반대 투쟁(1927), 전북 옥구군 이업사 농장 쟁의(1927), 평북 용천군 불이흥업 서선농장 쟁의(1927~31) 등입니다.

 절정기(1930~35) :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 투쟁이었던 농민 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변화와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격렬해져 갔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지도를 받아 조직된 농민조합은 전국적으로 약 80여개나 되었는데, 함경도 지방의 농민조합 운동이 가장 격렬하였습니다. 함남 단천의 항일 농민 폭등(1930), 함남 정평의 항일 농민 시위(1930), 함남 흥원의 항일 시위(1931) 등입니다.
 농민들은 일제 타도, 치안유지법 철폐, 민족 차별 폐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획득 등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부분적이기는 하나 '토지는 경작하는 농민에게'라는 토지 혁명의 슬로건이 등장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2. 사회 변화
 1) 사회적 민족 운동
 ㄱ. 청년 운동 :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에 청년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여러 청년 단체가 전국에서 조직되었습니다. 1920년 12월 116개의 청년단체가 모여 결성한 조선청년연합회는 수양과 계몽의 성격이 강한 단체였습니다. 청년단체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청년들을 각성시켰으며, 야학을 열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들을 가르쳤습니다. 또,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1923년 이후 청년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여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등에 대한 지원에 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 조선청년총동맹(1924) :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된 이후 청년 단체들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었습니다. 이와 같은 청년 운동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 조선청년총동맹이었습니다.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 조선민족 해방운동의 선구자를 강령으로 내건 청년총동맹은 노동, 농민 운동을 지지하는 등 여러 부문 운동에 개입했습니다.

 ㄴ. 학생 운동 : 3.1 운동 뒤 더욱 활성화된 학생 운동은 1923년 2월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조선 학생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또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조직으로는 경성학생연맹, 조선학생 과학연구회 등이 조직되었습니다. 특히 1925년 11월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학생 과학연구회는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6.10 만세운동과 신간회 결성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학교마다 사회주의 독서회, 비밀 결사 등이 조직되어 동맹 휴교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에도 각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ㄷ. 소년 운동 : 청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년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0년 진주 소년회가 조직되면서 소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소년 운동은 천도교 청년회가 소년부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그 후 천도교 소년회로 독립하여 어린이날(1922)을 제정하고 기념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소년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23년에는 전국적인 소년 운동 조직인 소년 운동 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전국적 조직체로서 조선소년연합회(1927)가 조직되어 체계적인 소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방정환, 조철호 등은 소년 운동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애국심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들 사이에 사상과 이념의 대립으로 소년 운동도 분열되었습니다. 더구나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일제가 한국의 청소년 운동을 일체 금지하고 단체를 해산함으로써 청소년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ㄹ. 여성 운동 :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 인식도 높아졌습니다. 1920년대 전반기 전국적으로 여자청년회, 부인회 등 수많은 여성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여성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중심 단체로는 조선여자교육회, 조선여자청년회가 있었으며, 종교 계통으로는 조선여자 기독교청년회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야학, 강연회 등을 통한 문맹 퇴치, 풍습 개량, 지식 계발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었습니다.
 1924년 5월에는 주세죽, 허정숙 등이 조선여성동우회 등을 조직하여 여성 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을 결합시켰습니다. 또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을 하게 되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 운동과 대립, 갈등을 보이다가 양측이 통합하여 근우회를 결성하였습니다.

 ㅁ. 형평 운동 :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습니다. 또 학교입학통지서에서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습니다.
 * 조선형평사(1923) : 백정 출신들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창립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창립 목적은 계급의 타파, 공평한 사회의 건설, 모욕적 칭호의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의 향상, 동지의 화목, 협력, 상조 등에 두었습니다. 조선형평사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백정의 인권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부문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차 힘을 잃어 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분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여전히 백정 출신을 차별하였으며,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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