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민족 문화 운동


 1. 국학 운동
 1) 국어 연구
 ㄱ. 조선어 연구회(1921) : 3.1 운동 이후 한말의 국문연구소의 후신으로 임경재, 장지영, 김윤경 등의 주도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습니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습니다.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습니다.

 ㄴ. 조선어학회(1931) :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한글 교육에 힘써 한글 교재를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회원들이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글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대중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동아일보 등 신문사와 제휴하여 전국적으로 조선어강습회를 열었습니다.(1931) 또 중단된 한글 잡지를 조선어학회가 같은 이름으로 계승하여 일본의 탄압으로 강제 폐간당한 1942년까지 93호를 발간하면서 국어의 학술적 연구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습니다. 훈민정음 언해본(1932),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 등을 발간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펀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2) 국사 연구
 ㄱ. 일본의 식민 사관
 타율성론 :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과 한반도 지역의 독립된 역사성 및 문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그 요지는 한반도 지역의 역사가 그 주민의 자발적 활동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중국, 만주, 일본 등 주변 민족의 자극과 지배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종류로는 임나일본부설, 만선사관론, 반도적 성격론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정체성론 : 정체성론은 주로 어용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이들은 20세기 초 한국의 경제 조긱과 경제 단위가 일본 10세기 초인 고대 말기에 해당할 정도의 후진 사회였다는 주장입니다.

 당파성론 :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을 지적한 것으로, 한마디로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를 당쟁이라 표현하고 그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일선동조론 :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하나다." 라는 이른바 일선동조론은 일본서기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아버지라는 스사노 오노미코토가 신라에 강림하여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인과 한국인은 같은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일 병합'은 당연하다는 주장입니다.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일선동조론을 내세워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강제 징용과 강제 징병 등 일제의 침략 전쟁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데 적극 이용했습니다.

 ㄴ. 연구 방법 :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사를 수호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론이 체계화되어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이 대두하였습니다.

 * 민족주의 사학 :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박은식 : 우리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일본의 침략 과정을 소개한 한국통사(1915)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소개한 한국 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신채호 : '낭가 사상'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습니다. 저서로는 꿈하늘(1916), 조선상고문화사를 저술하여 단군 조선의 문화와 정치사를 쓰고 대종교와 연결되는 전통적 민간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혁명 선언'에서는 지배층 위주의 유교적 사관인 사회진화론을 부정하고 민족적 민중에 의한 재발전을 강조하였습니다. 조선사연구초(1925)나 조선상고사(1931)에서는 사대적 유교 사관을 비판하고 민족 항생사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 고대사를 새로이 체계화시켰습니다.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에는 정인보, 안재홍 등이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정인보 : 조선사연구에 실린 '5천년 간 조선의 얼'이란 글에서, 역사의 본질을 '얼', 즉 민족 정신에서 찾는 '얼 사관'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의 척추인 얼의 반영이며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곧 이 얼의 줄기를 세우는 일이라 했습니다. 주요 활동으로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하였고, 광대토대왕릉비를 연구하여 일본인의 잘못된 고대사 연구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양명학과 우리 나라의 5천년의 얼을 정리하여 민족 정기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문일평 : 민족 의식,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일원적 정신을 제시하였고 조선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심의 결정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종과 실학자들의 민족 지향, 민중 지향, 실용 지향을 높이 평가하는 사론을 발표하여 일반 국민의 역사 의식을 계발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국제 관계에서 실리적 감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이런 시각에서 대미관계 50년사라는 명저를 내기도 하였는데, 그의 저술은 호암 전집(1939)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었습니다.

 * 사회 경제 사학 :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습니다.
 백남운 : 조선 사회 경제사(1933)와 조선 봉건사회 경제사(1937)를 지어 처음으로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세계의 제 민족과 같은 궤적에서 일원론의 변증법적 역사 발전 법칙에 의해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실증주의 사학 : 한국 학자들이 세운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사학도 발달하였습니다. 개별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순수 학술 활동을 목표로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한국사를 연구한 학풍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순수 학문을 포장하면서 식민주의사학에 학문적 대응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진단학회(1934) : 일본인 학자들의 주도로 조직된 청구학회(1930)에 자극을 받아 진단학회를 조직하였고, '진단학보'라는 학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병도, 이상백, 김상기 등의 역사 학자와 이윤재, 이희승 등 국어 학자, 송석하, 손진태 등 민속 학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독립 운동에 직접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문화사 연구의 지평을 열어 주었고, 역사학을 비롯한 국학 전반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 신민족주의 사학 : 문헌 고증을 토대로 하고 사회경제 사학을 수용한 바탕에서 민족 사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안재홍과 손진태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안재홍 : 극좌와 극우를 배격하고 만민공생의 통합된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를 계승, 발전시켜 고대 국가의 사회 발전 단계를 해명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해방 후 조선상고사감(1947)이라는 단행본을 엮어냈고, 우리나라의 전통철학을 정리하여 불함철학대전(1940)과 조선철학(1944)을 저술하였습니다.

 손진태 : 안재홍의 영향을 받아서 지배 계층 위주의 봉건적 사관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계급 사관을 비판하였으나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신민족주의 사관을 확립했습니다. 대내적인 사회 발전 논리와 대외적인 민족 성장 논리를 결합하되 "계급의 생명은 짧고 민족의 생명은 길다"고 하여 계급 투쟁보다는 민족 균등의 입장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역사 이론은 신채호의 이론을 발전시켜서 투쟁과 화합의 양면성을 추구했습니다. 저서로는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에서는 정치, 경제 형태와 민족 균등의 발전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 신라를 민족 결정기로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손진태 등에 의한 민속학 연구도 활기를 띠었으며,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유출을 막는 데 힘썼습니다.

 3) 민족 교육과 과학 대중화 :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시도되었습니다.
 ㄱ. 민립대학설립운동 : 1920년대에는 조선여자교육회와 조선교육회가 창립되어 교육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을 통해 최고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도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ㄴ. 문맹퇴치운동 :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차별 교육 정책으로 인하여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문맹자가 증가하였습니다. 문맹자의 증가는 민족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바로 일제가 목표로 하였던 한국인의 우민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3.1 운동을 계기로 문맹 퇴치가 급선무임을 자각하여 이를 실천에 옮겨 갔습니다.
 대한 제국 시기 이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개량 서당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20년대 이후에는 야학이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기관과는 달리, 우리 글과 말, 역사를 교육하여 항일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습니다. 일제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야학을 탄압하여 문을 닫게 하였고 '1면 1교주의' 시책을 강행하여 공립 보통학교를 증설하였으나 이에 수용된 한국 아동은 학령 아동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주 사변 이후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야학과 개량 서당 등 민족 교육 기관은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한글 보급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은 언론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문자보급운동 :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방학 중에 귀향하는 중등 이상의 남녀 학생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 문맹 퇴치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브나로드 운동 : 동아일보는 1931년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브나로드운동은 당시 2천만 국민 중 80%에 가까운 1600만 명이 문맹자라는 심각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 절약 등 생활 개선을 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어학회 : 언론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어학회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협조하였습니다. 문자보급운동에 사용될 교재를 만들었으며 대부분 사립 학교 교원으로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솔선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글 강습회를 열었습니다.
 운동이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산되자 조선 총독부의 탄압이 가혹해졌고, 결국에는 대규모의 순회 강습이나 문맹퇴치운동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져, 민족 교육 운동으로서의 문맹퇴치운동은 중단되었습니다.

 ㄷ. 과학대중화운동 : 일제의 교육 정책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낮은 수준의 실업 인력을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선진 근대 과학 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항공기는 과학 기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1922)은 우리 민족에게 큰 감명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비행술은 "우리도 하면 된다."라는 자신과 긍지를 온 민족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지와 잡지 등에서도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습니다.
 발명학회(1924) : 발명학회는 과학 종합 잡지인 과학 조선의 간행과 '과학의 날' 제정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과학 지식을 보급하였습니다. 과학 지식 보급회를 설립하여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으며, 과학 도서의 편찬과 간행, 강연회, 전시회 등의 개최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나, 1930년대 말 일제의 강요로 일제가 만든 과학 단체에 강제로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학 진흥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과학 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2. 문예 활동
 1) 종교 활동 :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종교 단체들은 다양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ㄱ. 천도교 : 3.1 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문화 운동을 표방한 민족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습니다. 개벽, 부인, 신여성, 학생, 어린이, 조선농민 등 많은 출판물을 발간하여 민중의 자각과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제2의 독립선언운동을 계획하였고, 사회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문화 발달과 수호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ㄴ. 대종교 :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대종교는 일제의 심한 탄압을 피해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과 북로군정서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일제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미쓰야 협정을 맺으면서 대종교의 불법화를 관철시켰습니다.

 ㄷ. 기독교 : 기독교는 천도교와 함께 3.1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3.1 운동의 지방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많은 신자가 투옥되거나 학교가 폐쇄되기도 하였습니다.

 ㄹ. 천주교 : 개화기 이래 전개해 온 고아원, 양로원의 설립 등 사회 사업을 계속 확대시켜가면서 경향 등의 잡지를 통해 민중 계몽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일부 신자는 만주에서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습니다.

 ㅁ. 불교 : 사찰령(1911)으로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나누고 본사의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총독에게 주지 임명과 사찰 재산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한 악법이었습니다. 한용운 등은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통합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에 과감히 맞서서 민족 종교의 자세를 견지하였습니다.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여 한용운의 조선 불교 유신회(1921)를 중심으로 불교계 정화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 불교 유신회는 사찰령의 폐지와 천일주지 성토운동을 벌였으며, 근대적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ㅂ. 원불교(1916) :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현대화를 주장하면서 민족의 자립 정신 고취와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립 정신을 키워갔으며, 남녀 평등, 허례허식의 폐지 등 새생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ㅅ. 유교 : 일제는 한일 병합 이후 일제의 침략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유림 세력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경학원 규정을 공포하고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전국의 향교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국외에 망명하거나 의병 투쟁과 무력 항쟁을 계속하는 한편 교육 사업과 계몽 운동, 독립 청원을 통해 항일 독립 의식을 고양하고 전통 문화를 수호하면서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림 세력은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으나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우송하여 파리 장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2) 문학과 예술
 ㄱ. 시대 과제와 일본 통제 :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탄압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후 일제는 모든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조선문인협회, 조선음악과협회, 조선연극협회를 조직하고, 모든 활동을 침략 전쟁과 일제의 식민 통치를 찬양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이와 같은 내용이 아닌 것은 모두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ㄴ. 문학
 1910년대에는 이광수 등의 활동으로 근대 문학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은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 사상, 자유연애의 칭송, 신생 한국의 전망 등을 담은 소설입니다.

 1920년대에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예술성만 추구하고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로 창조(1919)가 있고 폐허(1920), 백조(1922)도 발행하였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습니다. 신경향파 문학은 3.1. 운동 이후 노동자, 농민들이 활발히 조직화되는 추세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순수 예술을 표방하는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문학이 현실과 생활을 반영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한편 프로문학은 극단적인 계급 노선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대중과의 연대성이 약화되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국민 문학 운동을 일으켜 계급주의에 반대하고 문학을 통해 민족주의 이념을 선양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민족 의식과 민족애의 고취, 모국어 사랑, 전통 문화의 부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5, 26),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등이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문학의 분야도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으로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제가 중일 전쟁을 도발하고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시작한 이후 일제는 우리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면서 군국주의 찬양을 강요하였습니다. 이광수, 최남선 등과 같이 일부 문인은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육사, 윤동주 같은 저항 시인의 활동도 활발하였습니다.

 ㄷ. 민족 예술
 음악 부분에서는 1910년대에는 서양 음악에 기반을 두고 창가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국권 피탈 후 학도가, 한양가, 거국가 등 망국민의 슬픔과 일제에 대한 저항적 성격의 노래가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전통 회화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서양식 유화가 새로운 미술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제의 수탈을 비판하는 풍자화도 등장하였습니다. 

 연극은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어느 분야보다 파급 효과가 컸습니다. 3.1 운동 이후 민족 계몽 운동이 확산되자, 동경 유학생들이 극예술 협회를 조직하고 연극 공연을 민중 계몽의 수단으로 삼아 이 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본격적인 근대 연국은 토월회(1923), 극예술연구회(1931)가 조직되어 활동한 이후에 등장하였으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과 강요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연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어를 쓰지 않는 연극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활동은 다른 분야보다 발전이 늦었습니다. 처음 일본 영화의 보조 수단으로 출발하여 한국 영화로 독립하기까지는 자본, 기술, 자재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중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발표한 것은 한국 영화를 획기적으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우리 고유의 향토적인 정서가 은은히 배어 있는 슬픈 가락을 깔고 당시 일제 지배하의 망국의 통분과 슬픔을 자아내는 한편 항일 의식과 애국심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역시 1940년 조선 영화령이 발표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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