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현대의 경제와 사회


 1. 현대의 경제 : 8.15 광복은 우리 손으로 국가를 수립하고 일제 지배의 잔재 청산과 각종 개혁 실시 및 제도 정비 등을 수행할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었습니다. 광복 직후에 주로 일본 자본으로 운영되던 많은 기업이 원료와 기술, 자본 부족의 어려움으로 공장의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미군정하에서는 물가가 계속 치솟고, 심각한 생필품 부족 사태가 벌어져 경제가 어려워졌습니다. 북한의 전기 공급 중단으로 남한의 경공업 중심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1) 제1공화국 : 정부 수립 이후에 농지 개혁과 귀속 재산 불하가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ㄱ. 농지 개혁 : 농지 개혁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법이 제정되면서 실시되었습니다.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안'이 제정되고, 1950년 3월에 동시행령이 공포되었습니다. 목적은 농지개혁법에 의해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농가 경제의 자립과 농업 생산력의 증진으로 농민 생활의 향상과 국민 경제의 균형 발전을 기하기 위해 실시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유상 매수를 했는데 비농가의 농지, 자경하지 않는 자의 농지, 3헥타르를 초과하는 농지는 국가에서 수매하여 이들 지주에게 해당 농지 연 수확량의 150%로 5년간 연부 상환 보상하도록 하는 지가 증권을 발급하였습니다. 지가증권은 국가에서 사들인 농지 값을 5년에 나누어 그 해 공정미가로 계산하여 현금으로 보상받는 것입니다. 그 외에 신한공사가 관리하는 적산 농지와 국유로 소유자가 분명하지 않는 토지는 국가가 흡수하였습니다. 여기서 3정보 이하의 땅은 제외하였으며, 3정보 이상의 땅도 지주들이 이미 팔아버린 경우가 많아서 개혁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논밭인 땅을 과수원이나 염전, 미개간지, 교육재단용 등으로 지목을 변경하여 농지 개혁 대상에서 제외시킨 경우도 많았습니다.
 정부가 수매한 농경지는 직접 경작하는 영세 농민에게 3헥타르를 한도로 분배하되 그 대가를 5년 연부 상환으로 해당 토지 수확량의 30%씩을 상환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농지 개혁에 의해 영세농에게 분배된 토지는 일반 수매 농지가 75만 5천헥타르, 적산 농지 26만 9천헥타르로, 총 면적은 102만 4천헥타르였습니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이루어진 농지 개혁으로 인해 소작 제도가 폐지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원칙이 수립되어 근대 농업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또 농지 개혁은 지주의 몰락과 함께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를 해체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농지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ㄴ. 귀속재산처리법(1949.12) : 미군정이 접수했던 귀속 재산을 민간에게 불하하는 정책도 추진되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 상당수의 기업이 민간에 넘어가 개인 소유 기업으로 바뀌어 산업 자본 형성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ㄷ. 미국의 원조 :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한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도로, 철도 등 물류 교통 시설이 파괴되었고, 제조업도 생산 시설의 절반이 파괴될 정도였습니다. 미국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시키려고 한국에 원조를 제공했고, 그 원조는 극심한 식량난과 전후 복구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원조는 주로 식료품, 농업용품, 피복, 의료품 등 소비재와 면방직, 제당, 제분공업의 원료에 집중되었습니다. 미국의 원조 물자로 식량이나 생활 필수품이 대량 공급되어 물자 부족이 해소되고, 소비재 공업도 성장하였습니다. 다만 원조액의 절반이 군사 원조에 충당되어 산업 재건에는 적극적으로 기여하지는 못했습니다. 밀이나 면화 같은 농산물이 값싸게 들어와 당시 농촌 경제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가격경쟁력에서 절대 열세인 국산 밀과 목화 재배지를 사라지게 하는 등 한국 농업을 피폐시켰습니다. 한편 몇몇 기업은 정부의 특혜 속에 삼백 산업을 일으켜 재벌로 성장하고 정치 자금을 제공하였습니다.

 ㄹ. 경제 불황 :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의 경제 원조가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원조에 의존했던 한국 경제는 고충을 받았습니다. 공장의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많은 중소기업이 파산했으며, 서민의 생활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57년 이후 삼백 공업을 중심으로 한 한국 경제는 극심한 불황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이에 1956년 경제개발 7개년 계획 중 전반 3개년계획을 발표했습니다. 1958년 부흥부 안에 산업개발위원회가 설치되고, 1960년 4월 15일에 '3개년 경제 발전 계획 시안'이 국무회의에서 승인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며칠 후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으나, 그 후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은 이에 기초했습니다.

 3) 1960년대
 ㄱ. 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 4.19 혁명 이후 정부는 자립 경제 건설을 목표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 성장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새로 수립된 제1차(62~66), 제2차(67~71)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의 경제 성장은 외국에서 도입한 차관과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은 결합시켜 섬유, 신발 등 경공업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부는 수출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성과로 연평균 9.6%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하였습니다. 또 1964년에 가동되기 시작한 울산정유공장, 1970년 7월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경제 개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경부고속국도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등 사회간접시설을 확충하여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섬유, 봉제, 신발 등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의 수출 정책 속에서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견뎌야 했습니다. 또한 생산비에도 못비치는 저곡가 정책 때문에 한 해 50만 명의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또 수출은 생산 원료와 중간재를 수입하여 조립하고 가공한 제품을 수출하는 조립 가공형 무역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출이 늘면 시설재와 원부자재 등을 더 수입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대외 의존성 때문에 외채가 늘어나고 국제 수지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4) 1970년대
 ㄱ. 새마을운동 : 정부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농촌 사회의 소득을 올리고, 생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1971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발의하여 전개된 이 운동으로 초가집의 개량, 농촌 도로의 정비, 영농 기반의 조성 등 침체된 농촌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뒤에는 도시에까지 확대되어 총체적인국가 발전 전략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직장과 모든 행정 단위에도 실천 조직이 짜여져 관민이 다 함께 이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ㄴ. 3~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 1970년 무렵에는 갚아야 할 차관의 원금과 이자가 늘어나고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차츰 벽에 부딪히면서, 그 동안 이룩해 온 경제 성장은 위기를 맞아 정책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1977년부터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행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습니다. 마산, 이리(현 익산) 등 수출자유지역을 지정하거나, 울산 포항 창원 여수 구미 등에 새로운 산업 단지를 조성하였습니다. 한국 경제는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일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중동 건설 붐을 이용하여 계속 성장했습니다. 월남전 패망 후 건설업체등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외화를 버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1973년에 준공된 포항제철과 1978년에 준공된 고리원자발전소는 이 시기 중화학공업의 상징적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점도 있었는데 1970년대 중화학공업은 수출 위주의 노동 집약적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대신 공작 기계 등 기초 부문 기계류와 기술은 외국에서 들여왔습니다. 그 결과 중화학 공업은 연평균 20.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1970년대 고도 성장의 원천이 되었지만 중요한 설비재와 원자재를 일본에서 계속 도입해야 했고 기술 역시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하여 대외의존도가 급격히 높아 갔습니다. 또 산업 부문 간 혹은 동일 부문 내의 불균형 성장은 농업, 중소기업의 몰락과 내수 산업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경제 구조의 기형화로 이어졌습니다. 그 외에도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에서 오는 부패의 만연, 지역 발전의 편차, 농촌의 피폐와 도시빈민층의 형성, 공해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이러한 모순점이 재야 및 학생 운동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ㄷ. 1970년대 후반 경제 불황 :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은 1978년부터 물가 상승과 더불어 실업이 증가하는 스테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습니다. 세계 경제의 불황은 세계 경제 환경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 경제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석유 위기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가 침체되면서 외국 자본과 대외 무역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차관과 수출에 기대어 급성장한 중화학공업에서 두드러져 수출이 막히자 중화학공업의 가동률은 점점 떨어졌습니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중화학 공업화 정책에 따라 많은 기업이 경쟁적인 과잉 투자를 함으로써 경제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5) 전두환 정부
 ㄱ. 경제 정책 :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는 경제안정화 정책을 내세워 구조 조정에 적극 개입하였습니다. 또 과잉 투자 조정과 부실 기업 정리, 재정 금융의 긴축 정책 실시 등을 단행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80년대 중반에 한국 경제는 안정되었고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3저 호황을 맞아 자동자, 가전 제품, 기계, 철강 등 중화학 분야를 주력으로 한 고도 성장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ㄴ. 시장 개방 정책 : 선진국의 시장 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 자유화의 폭이 확대되어 1986년 수입 자유화율은 91.5%에 도달했으며, 외국 자본의 투자 비율도 점차 확대하여 100%까지 허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기업에는 유리한 환경이었지만 값싼 외래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농촌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농촌 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 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양곡 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습니다.

 6) 산업화의 진전과 갈등
 ㄱ. 산업화 :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고도 성장으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고, 산업별 인구 구성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농업 사회가 해체되면서 대다수의 인구가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노동자의 비중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민 총생산은 연평균 9% 이상 높은 성장률을 이룩하였고, 수출 신장률도 거의 4%에 육박하였습니다. 이어 국민 소득도 증대되고, 수출 상품도 다양화되었으며, 수출 대상 지역도 종전과는 달리 널리 확대되었습니다.

 ㄴ. 경제적 갈등 : 농촌은 1950년대에는 값싼 외국 농산물의 원조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고, 1960년대에는 낮은 농산물의 가격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도시 빈민이나 실업자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제조업에 종사했던 많은 노동자는 산업화 과정에서 나쁜 작업 환경 아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악조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해 명목 임금은 계속 올라갔지만 실질 임금의 증가율은 노동 생산성의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또, 땅값과 집값, 전세 및 월세 상승, 물가 상승 등으로 서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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