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대 태동기의 경제


 1. 수취 체제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습니다. 게다가 굶주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양반 비챙은 정치적 다툼에 몰두하여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은 불만을 드러내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습니다.
 1) 전세 제도
 ㄱ. 영정법 : 인조 12년 정부는 연분 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켰습니다. 이러한 개편으로 전세의 비율이 이전보다 다소 낮아졌습니다. 다만 영정법은 대다수의 농민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났습니다. 전세를 납부할 때에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에 대한 보충 비용 등의 부과세가 함께 부과되었기 때문인데, 그 액수가 전세액보다 훨씬 많아 때로는 전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ㄴ. 양척동일법 : 효종 4년 수등이척법은 폐지되고 통일된 기준 척으로 1등 전척을 삼되 결부의 크기를 달리하는 방식이 채택되었습니다. 면적을 표준으로 삼아 동일한 면적에서의 수확량을 계산하고 1등전은 100부, 6등전은 25부로 정하여 각각 등급을 나누었습니다.

 2) 공납제도 : 당시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던 것은 공납이었습니다. 특히 방잡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을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어 대동법이 실시되었습니다.

 ㄱ. 대동법 실시 :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10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광해군 원년에 이원익, 한백겸 등의 주장에 따라 방납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에 최초로 시행되었습니다. 중앙에 선혜청과 지방에 대동청을 두고 이를 관장했습니다. 인조 2년 조익의 건의로 강원도에서도 실시되었습니다. 효종 2년 김육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실시하였고, 효종 9년 정태화의 건의로 전라도에 실시하였습니다. 숙종 34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황해도까지 전국에서 실시되었습니다.
 100년이나 걸린 이유는 일단 대동법이 실시되면 토지 면적에 따라 공납이 차등적으로 부과되므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양반 지주층은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경주인, 토호 등 종래 방납인들은 공인으로 다시 뽑힌다 하여도 중간 취득 이익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공납을 토지세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전국적인 양전이 철저히 실시되지 못한 것이 다른 이유입니다.

 ㄴ. 대동법 내용 : 대동법에서는 소유하고 있는 토지 1결마다 미곡 12두를 봄, 가을로 6두씩 징수했습니다. 대동법은 공납을 전세로 바꾼 까닭에 토지가 많은 부호에게는 불리하고 토지가 적거나 없는 농민에게는 유리하여, 농민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습니다. 국가는 전세 수입의 부족을 이로써 보충하여 국가 재정이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지역에 쌀 가격이 차이가 있고 운송 문제가 있어서 목면, 마포, 전화로 바꿔 내기도 하였는데, 이를 환봉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아울러 납세자의 요구에 따라 잡곡으로도 대납하였는데, 이를 대봉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납부한 미곡들을 중앙의 선혜청에 모내는 상납미와 지방에 유치해서 지방관아의 경비에 충당한 유치미로 나누어 사용되었습니다. 선혜청은 숙종과 영조 때에는 진휼청과 균역청을 각각 아우르게 되어, 호조를 능가하는 조선 최대의 재정기관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또 조세곡 운송량이 늘면서 경강선운업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국가는 선혜청에서 징수한 쌀, 포, 돈을 공인에게 공가로서 지불하여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습니다.
 * 공인 : 공인은 관수품 조달 상인으로서 정부의 비호를 받는 특권 상인이었습니다. 대동법 실시 이전부터 각 관청에 공물을 조달하고 있던 경주인이나 서울의 시전상인, 장인들이 공인이 되었습니다. 공인들의 활동으로 상인 자본의 규모가 커져 도고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ㄷ. 영향과 한계 :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공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가 성장하고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공인의 주문에 따라 생산하는 수공업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또 경상도의 삼랑진,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지가 미곡 집산지로서 각광을 받아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은 농촌 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 질서와 사회 체제의 이완, 해체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만 매년 정기적으로 바치는 상공은 없어졌지만, 왕실에서 쓰는 진상이나 별공은 그대로 남아 현물 징수가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납미의 수요가 매년 증대되기 시작하자 수령들은 부족한 경비를 점차 농민에게 부담시켰다는 한계 역시 있습니다.

 3) 군역 제도
 ㄱ. 양역의 모순 : 군적수포제로 인해 지방 수령이 군역 부담자로부터 번상가로 포를 징수하였습니다. 이때 거둔 포를 중앙에 보내면 병조는 군사력이 필요한 각 지방에 일정한 양을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거나 상비병제를 채택하도록 하였습니다. 군포를 징수하는 기관은 5군영만이 아니라 중앙의 관청 혹은 지방의 감영, 병영 등도 각각 군포를 배당 받아 거두었습니다. 양정들이 부담하는 군역도 반드시 2필역으로만 고정되지 않아 2필 혹은 3필을 내야 하는 등 일률적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5군영의 설치와 북벌 준비에 따른 군역의 강화가 군역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정부는 재정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군포의 액수를 증가시켰으며 군포를 수납하는 과정에서 수령 아전들도 농간과 횡포를 부렸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숙종 때 본격적으로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군제변통론이 크게 거론되었습니다. 경종, 영조 대에 양역의 폐단이 매우 심화되었으며 이를 수습하는 문제는 절박해졌습니다.

 ㄴ. 균역법 : 군포를 1년에 1필로 줄이면서 균일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경감된 부분은 국가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보충책으로는 일단 선무군관포가 있는데 이는 양인이면서도 군포 부담에서 빠지던 양인의 상층을 선무군관으로 편성해서 다시 포를 받아낸 것입니다. 또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토지 1결당 쌀 2두를 부과한 결작이 있으며 전국의 어장과 선박에서 거두는 어염선세는 종전에 궁방에 속해 있던 것이었으나 균역법 실시로 국가 세원이 되었습니다. 또 전국의 탈세전을 적발해서 세금을 받아낸 은여결세도 있습니다.
 그 결과 군포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자 농민 부담은 한때 가벼워졌고 농민의 피역 저항도 소강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미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정부가 책정하는 양정의 수가 급격히 증가함으로써 농민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습니다.

 4) 삼정 체제
 ㄱ. 삼정 :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국가 재정 체계가 조용조 체제로부터 전정, 군정, 환곡이라는 삼정체제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전정 : 삼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토지세 징수를 말합니다. 전세(4두), 대동세(12두), 삼수미세(2.2두), 결작(2두) 등을 비롯한 많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 초에 토지에 부과된 것은 전세 정도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부세들이 토지에 집중되면서 전결세의 항목이 많아졌습니다.
 군정 :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 부담은 포 2필에서 1필로 줄었으나 포 1필이 쌀 6말에 해당되어 그 부담이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곡 : 환곡은 본래 빈민 구제책으로 춘궁기에 국가의 곡식을 농민에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10%의 이자를 가산하여 받아들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환곡의 진휼 기능은 국가 재정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중앙의 각 아문은 물론 지방의 감영, 병영, 군현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환곡을 설치, 운영하여 주요 재정원으로 삼았습니다.

 ㄴ. 삼정의 문란
 전정 : 대동미, 삼수미 등 무려 43개 종류의 잡세가 전세에 부과되어 전정의 문란을 심화시켰습니다.
 군정 : 군포의 총액을 채우기 위해 일시불로 걷고(마감채), 젖먹이 아이(황구첨정), 죽은 사람(백골징포), 노인(강년채), 이웃(인징), 친척(족징)으로부터 군포를 받아냈습니다.
 환곡 : 환곡은 19세기에 가장 문란했습니다. 본래 군현의 창고에 보고나된 환곡의 원곡 가운데 반은 창고에 두고 나머지 반만을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가면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고 창고 안의 모든 곡식이 농민에게 분배되었습니다. 반작이라 하여 출납을 허위 보고하여 잉여분을 차지하고, 가분이라 하여 창고에 남은 곡식까지 대출하여 이익을 취하고, 허류라 하여 창고에 없는 곡식을 있는 것처럼 장부에 꾸미고, 분백이라 하여 반은 겨를 섞어서 1석을 2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2. 서민 경제의 발전
 1) 농업
 ㄱ. 농업 복구 정책 : 양란으로 황폐된 농촌을 재건하려는 운동은 국가 사업으로 나타나서 호적과 산업이 재정비되고, 면리제와 5가작통이 실시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전결의 전결 수는 전쟁 이전의 1/3로, 인구는 1/10 이하로 줄어들었는데, 가장 피해가 컸던 경상도는 전쟁 전의 약 1/6으로 농지가 감소되었습니다. 토지의 황폐화와 토지대장의 소실 등이 그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전후에 계속하여 진전이 개간되고 양전 사업이 실시되면서 토지 결수는 점차 늘어났습니다.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는 간척 사업이 활기를 띠어 농경지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광해군 때에는 54만 결, 인조 때에는 120만 결, 숙종 때에는 140만 결 그리고 영, 정조 때에는 최고 145만 결까지 증가하였습니다.
 토지 결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수세지는 전결 수의 약 60%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나머지는 궁방전이나 관둔전 등 면세지였습니다. 왕실은 내수사를 통하여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고 장리로 불리는 고리대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특히 왜란 후에는 바닷가의 황무지를 불하받거나 민전을 사들여 수만 결의 궁방전을 차지하였습니다. 각 관청도 경비 조달을 위하여 둔전을 확해하여 갔습니다.

 ㄴ. 농촌 경제의 변화 : 농민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습니다.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습니다.
 농민들은 주로 작은 규모의 보를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서 물을 확보하였습니다. 현종 3년 제언사가 설치되고, 정조 2년에 제언절목이 반포되어 국가의 지원 하에 제언, 보, 저수지 등이 새로이 축조되거나 보수되었습니다. 18세기 말에는 큰 저수지(제언)가 3590개 소, 작은 저수지(보)가 2265개 소, 합하여 저수지의 총수가 약 6천 개에 달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수원의 서호, 김제의 벽골제, 홍주의 합덕제, 연안의 남대지 등은 가장 큰 저수지로 꼽혔습니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경영하는 광작이 성행했는데, 광작은 지주도 할 수 있고, 병작인도 할 수 있었습니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지주는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접 경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소작 농민은 소작지를 잃기는 쉬워지고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밭에서도 밭고랑과 밭이랑을 만들어 밭고랑에다 곡식을 심는 이른바 견종법이 보급되어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견종법은 이랑이 바람을 막아 주고 습기를 머금기 때문에 작물이 추위와 가뭄도 견딜 수 있게 해주어 수확량이 많았습니다. 또 보리(또는 밀)와 콩(또는 조)을 매년 두 번씩 재배하는 그루갈이(윤작법)가 성행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퇴비, 분뇨, 석회 등 거름의 종류를 다양하게 개발하였고, 거름의 양도 풍부해졌습니다. 거름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개선되었습니다. 또 18세기 이후 철제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농기구가 제작되어 쟁기, 써레, 쇠스랑, 호미 등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논농사에서는 소를 이용한 쟁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생산력이 보다 증대되었습니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업 분야에서도 상품화를 전제로 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습니다.
 쌀 :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습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습니다.
 인삼과 담배 : 인기 있는 상업 작물로서 재배되었습니다. 수출 상품으로 인기가 높았던 인삼은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각지에서 널리 재배되었고, 담배도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전래된 뒤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재배되었습니다.
 채소 : 서울 근교의 왕십리, 송파 등지에서는 인구가 늘어난 서울 시민을 상대로 하여 채소 재배가 성행하였습니다.
 면화 : 경상도를 비롯한 삼삼 지방과 황해도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었습니다. 면화는 당시 서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옷감의 원료로서 그 수요가 많았습니다.
 구황 작물 : 전란을 겪으면서 기근을 대비한 구황 작물의 필요성이 높아져서 고구마, 감자, 고추, 호박, 토마토 등 새로운 작물이 널리 재배되었습니다. 고구마는 1764년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일본에서 가져오고, 감자는 청에서 종자를 들여왔습니다.

 농업의 발달에 따라 많은 농사가 출간되었습니다. 신속은 농가집성에서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습니다. 또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 재배법뿐 아니라 채소, 과수, 원예, 양잠, 축산 등의 농업 기술을 소개하는 농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박세당의 색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ㄷ. 양반과 농민 생활
 양반은 양난 이후 토지 개간에 주력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습니다.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이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장에 팔아 이득을 남겼습니다. 또 토지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토지 매입에 더욱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불리는 지주도 나타났습니다. 양반 중에는 물주로서 상인에게 자금을 대거나 고리대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변동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하는 양반도 나타났습니다.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 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경영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일반화되었습니다.
 한편 소작농이라도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작권을 인정받고 소작료도 일정 액수만 내게 되면서 근면하고 시장 경제를 잘 이용하는 농민은 점차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습니다.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습니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였습니다.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황해도의 수안,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이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병작 농민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는 수확의 반을 나누는 타조법이 그대로 관행되었으나, 18세기 말경부터는 전라도 등 일부 지방의 궁방전, 역둔토에서 정액세인 도조법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타조법 : 타조는 지대의 액수를 미리 정하지 않고 지주와 작인이 수확량의 분배율만 정해 두었다가 매년 생산물의 양을 보아서 그 비율에 따라 분배하였는데, 대체로 수확물의 1/2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타조법은 수확의 다과에 따라 매년 소작료가 달랐기 때문에 수작인의 토지 경영에 대한 지주의 감독과 간섭이 심하여 소작인의 자유로운 토지 경영을 불가능하게 하고 소작인들의 생산 의욕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이며 경제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마음대로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작 농민은 좀 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습니다. 소작인의 저항이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낮추거나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 도조법 : 도조법은 도지권을 가진 전호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도지권은 작인이 지주로부터 토지를 개간했거나, 제방을 쌓거나 매수하였을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도지구너을 가진 작인은 그 토지를 매매할 수도 있었습니다.
 소작료를 미리 협정하고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입니다. 도조는 대체로 수확량의 1/3을 표준으로 하여 정해졌으므로 타조보다 작인에게 유리하고, 또 일년 수입을 예상하여 계획된 농업 경영이 가능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도조법의 실시로 지주와 전호 사이는 신분적 관계보다 경제적 관계로 바뀌어갔습니다.

 2) 수공업과 광업
 ㄱ. 수공업 : 관청 수공업이 중심이 된 조선 초기의 수공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적으로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관영 수공업에서는 무기, 종이, 옷, 자기, 비단, 유기(놋그릇), 화폐 주조 등 국가의 수요가 많은 분야에서는 뒤늦게까지 관청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그것도 점차 민영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국가는 대규모 건축 사업이 있을 때는 장인을 일단 노동자로 고용하여 물품을 제조하게 하였습니다. 정조 때 화성을 건설하면서 수천 명의 장인을 고용하여 근무 날짜에 따라 일당을 지부한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집니다. 16세기 이후 공장들은 가급적 등록을 기피하고, 또 정부의 재정 사정도 악화되어 조선 후기에는 관영 수공업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공인으로부터 관수품을 사들이고, 공인은 수공업자에게 주문하여 관수품을 제조, 구입하였습니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에 비해 경쟁력도 높았습니다. 민간 수공업자의 작업장은 흔히 점으로 불리었는데 점은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사장의 작업장으로, 철기 수공업체는 철점, 사기 수공업체는 사기점이라 하였습니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작업장과 자본의 규모가 소규모여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대부분 공인이나 상인에게 주문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습니다. 선대제 수공업이라고 합니다. 주로 종이, 화폐, 야철, 자기 등과 같이 소비 규모가 크고 막대한 원료를 필요로 하는 물품은 대상인이 원료와 대금을 선대해 주고 생산된 물품을 사들였습니다. 그들을 물주라고 불렀습니다. 물주의 등장은 17~18세기 수공업의 특징적인 현상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제조 규모가 컸던 것은 솥과 놋그릇으로서, 경기도 안성과 평안도 정주의 납청은 놋그릇 생산지로 가장 유명하였습니다. 이 곳의 수공업자들은 자기의 자본으로 공장을 설비하고 원료를 구입하였으며,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에 의해서 물품을 제조하였습니다.

 농촌에서는 보통 자급자족을 위한 부업의 형태로 수공업이 행해졌지만 점차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었고, 더 나아가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가도 나타났습니다. 농촌에서는 주로 옷감과 그릇 종류가 생산되었습니다.

 ㄴ. 광업 :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광하였습니다. 광산 경영은 정부가 수요 액수를 일률적으로 정하여 부과하면 해당 고을의 수령이 농민들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하여 채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부역 노동은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고, 이로 인하여 때로는 농사철을 놓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6세기 이래로 농민들은 광산에 부역으로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악화되고 있는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민간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 혈주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가 있었지만 물래 채굴하는 경우도 성행하였습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농민들이 광산에 너무 모여들어 농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고려하여 공개적인 채취를 금지하고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광산 개발이 이득이 많았으므로 금광, 은광을 몰래 개발하여 이른바 잠채가 날로 번창하여 갔고, 큰 자본을 모은 이도 나왔습니다.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거의 70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서도 평안도 단천과 경기도의 파주, 교하는 특히 유명하였습니다.
 18세기 말에는 상업 자본의 채굴과 제련이 쉬운 사금 채굴에 몰리면서 금광의 개발도 활발해졌습니다. 금광은 평안도의 자산, 성천, 수안이 유명하였습니다.
 금, 은광만큼은 활기를 띠지 않았으나 놋그릇과 무기 그리고 동전 주조의 원료로서 철광과 동광 개발이 촉진되고, 화약 제조의 원료인 유황 광업도 일어났습니다.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1) 상업
 ㄱ. 서울 :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 민영 수공업의 발달,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도시 유입이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더욱 촉진하였습니다.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으며, 처음에는 공인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조선은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과 시전 상인에게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이라 하여 금지시켰습니다. 전안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 임의로 해당 물종에 관한 상행위를 벌일 경우 시전은 난전으로 규정하여 이들의 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유 물품까지도 압수, 혹은 거래 물품에 대한 일정액의 수세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서울의 경우 시전 상가 외에 남대문 밖의 칠패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 등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 신해통공 :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습니다. 사상들은 육의전 상품이 아닌 것은 자유스럽게 관상과 경쟁하면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시전 이외의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ㄴ. 지방 :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대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를 토대로 하였습니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장시 가운데서 광주 송파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창원의 마산포장,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대구, 마산, 안동, 황해도의 은파, 강원도의 대화장(평창) 등이 유명하여 새로운 상업 도시로 성장해갔습니다. 장시는 지방민의 교역 장소로 인근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습니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장시는 시장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음식을 즐기며, 각종 놀이도 구경하는 축제의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 보부상 :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한 행상으로서,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일정 지역 안이나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활동하였습니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습니다. 상인들은 포구를 거점으로 선상, 객주, 여각 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습니다.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서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 상인이 대표적인 선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습니다.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습니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습니다.

 ㄷ. 도고 상업 : 조선 후기에는 도고라고 불리는 독점적 도매 상업이 성행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보편적인 상업 형태인 도고 상업의 발달은 유통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상업 자본의 축적을 가져왔으며, 그 자본의 일부는 정치 자금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다만 그로 인해 많은 영세 상인의 몰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상품 판매의 독점 행위를 이용하여 물가를 올리기도 하고, 국가에 대한 탈세 행위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도고 상인은 관상인 시전 상인과 공인 가운데서 출현하였고, 사상 중에서 서울의 경강 상인, 개성의 송상, 동래의 내상, 의주의 만상, 평양의 유상 등은 대표적인 거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2) 대외 무역의 발달 :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기를 띠었습니다.
 ㄱ. 상인 : 국제 무역에서 사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상인이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은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이었습니다. 특히,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습니다.

 ㄴ. 청과의 무역 :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과의 무역은 사신 무역, 특히 역관 무역이 중심을 이루다가, 임진왜란 중 식량을 확보하려고 중국과의 사이에 중강을 중심으로 개시가 이루어지면서부터 민간 무역이 열렸습니다. 중강 이외에 회령, 경원 등에서도 열렸고 참가하는 상인과 교역 상품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두 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개시 무역은 제약성이 많아 점차 두 나라 상인 사이에 공식적인 교역량을 넘은 사무역이 성행하면서 후시 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모자, 말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가죽 등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로는 개성 인삼이 대종을 이루었습니다.

 ㄷ. 일본과의 무역 :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까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에서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조선은 인삼, 쌀, 무명 등을 수출하고, 청에서 수입한 명주실과 각종 비단 등을 넘겨주는 중계 무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3) 화폐유통
 ㄱ. 화폐 보급 :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인조~효종 시기에는 화폐의 유통에 힘써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효종 때에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습니다. 그러다 17세기 말 영의정 허적의 제의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습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환, 어음 등의 신용 화폐가 점차 보급되어 갔습니다. 이는 이 시기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과 상업 자본의 성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ㄴ. 영향 : 금속 화폐의 보급은 상품 유통과 교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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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대 태동기의 사회


 1. 신분 제도와 가족 제도
 1) 신분 구조 : 양반의 수는 더욱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ㄱ. 양반 : 조선 후기에는 양반 상호 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으로 어느 한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일부 양반인 벌열 양반을 제외하고 다수의 양반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였습니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양반이 증가한 이유는 부를 축적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모면하려고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ㄴ. 중간 계층 : 중인은 청요직이라 불리는 관직에 임용이 막혀 있었습니다. 문반은 승문원, 홍문관 등에는 서울 향반이 임용되고, 중인은 승진이 어려운 교서관에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무과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서울 양반은 왕을 호종하는 선전관, 중인은 궁궐이나 성문을 지키는 수문청에 임용되었습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이,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입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자, 서얼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 정조 때에 서얼을 어느 정도 등용하자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상소하여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제각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서얼 허통은 꾸준히 계속되어 마침내 철종 2년에 신해허통 조치를 거쳐 완전한 청요직 허통이 이루어집니다.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은 기술직 중인에게도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실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습니다. 서얼 허통에 자극을 받아 중인들도 1850년대에 대대적인 연합 상소 운동을 벌였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청요직 허통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중인들은 경제력이 높아서 서울의 여러 곳에 시사를 조직하여 양반들과 어울려 문예 활동을 통해 양반과 비슷한 인문 교양을 쌓아 가는 한편,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 갔습니다. 19세기 이후에는 자신들의 신분 상승과 관련하여 중서층의 역사적 유래를 밝히는 사서와 명인들의 전기를 다투어 출간하였습니다. 한편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 서학을 비롯한 외래 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촉구하였습니다.

 ㄷ. 상민층 :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지만, 일반 서민 중에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지주가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양반이 되면 군역을 면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으며,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해 부를 축적하는 데 각종 편의를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양반 신분을 사들인 농민은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일부 농민이 부농층으로 성장하는 반면에, 일부 농민은 오히려 토지에서 밀려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16세기 이래 부역제가 무너져가면서 노동력 동원이 어려워진 국가나 관청에서 노임을 받고 성 쌓기나 도로 공사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부농층에 고용되어 어려운 삶을 영위해 나갔습니다. 부농층의 대두와 임노동자의 출현은 이 시기 농민의 분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ㄹ. 노비 : 조선 후기에 노비는 군공과 납속 등을 통하여 부단히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켰습니다. 국가는 군공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치는 자를 양인으로 풀어주고, 속오군으로 편제하여 군역을 지우기도 하였습니다. 국가에서는 공노비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어 그 효율성이 떨어지자, 공노비를 종래의 입역 노비에서 신공을 바치는 납속 노비로 전환시켰습니다. 또 노비의 신분 상승 추세는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으로 삼는 법이 실시(노비종모법)되면서 더욱 촉진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현종 10년에 시작되어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하다가 영조 7년에 정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양인과 노비 사이의 결혼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이 제도로 양인이 되는 노비가 적지 않았습니다.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낼 수 없게 되자, 순조 때에 일부의 공노비를 제외한 중앙 관서의 노비 66000여 명을 해방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2) 향촌 질서의 변화
 ㄱ. 관권의 강화 : 정부는 사족에 의한 군현 단위의 통제가 어렵게 되자, 향촌 사회를 직접 통제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 갔습니다. 정부는 수령의 권한과 면리제의 향촌 통제 기능을 강화하고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영조 때부터 탕평 정치가 시행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수령을 통해 향촌 사회를 직접 통제하기 위한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면리제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 조직을 수령 아래에 소속시켜 하급 기구로 만들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유향소는 경제소의 혁파로 유향소의 좌수에 대한 선임권이 향회의 추천을 받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결국 수령에게 귀속되었고, 좌수는 수령의 보좌역으로 격하되었습니다. 향회는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부세 수탈이 강화되고, 종래 사족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주로 수령의 부세 자문 기구 구실을 하였습니다. 곧, 수령 중심의 국가 권력이 향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재지사족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관권의 강화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농민 수탈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향리는 고을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계층으로 고을의 행정 사무가 분화되면서 이들의 조직과 기능도 분화, 강화되었는데, 특히 조세와 관련된 부분이 비대해졌습니다.

 ㄴ. 향전 : 요호부민들은 농민층만이 아니라 상인층 혹은 광산을 경영하여 부를 축적한 자 등 그 출신 기반이 다양하였습니다.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부농층의 성장 욕구는 재정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와 일치하여 정부도 이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정부는 납속이나 향직의 매매를 통하여 부농층 성장의 합법적인 길을 열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구너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여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였습니다.
 경제의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습니다. 평민과 천민 중에 재산을 모아 부농층으로 등장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는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향촌 사회 내부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가 점차 약화됩니다. 그 대응으로 양반은 군현을 단위로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고,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전국의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 사우가 많이 세워집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바탕으로 새롭게 성장하던 부민층 가운데 일부가 수령과 결탁하여 신향으로 성장하면서 기존의 사족층에 대항하였습니다. 신향층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고 향임직을 차지하여 차츰 향권을 주도하려 하자 구향들이 이에 반발하여, 향권을 둘러싸고 향전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납니다. 그 결과 수령은 경제적 이해 관계 때문에 대개 신향을 비호했기 때문에 향전의 결과는 대체로 신향의 우세로 기울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곳에서 신향이 향권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3) 가족 제도와 인구 변동
 ㄱ. 가족 제도 : 조선의 가족 제도는 부계와 모계가 함께 영향을 끼치는 형태에서 부계 위주의 형태로 변화하여 갔습니다. 가족이나 친족 체계가 부계 중심으로 바뀌면서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와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으로 문중이 발달하였습니다. 문중의 범위는 좁게는 8촌 이내의 부계 친족이며 최대로는 동성동본까지 확대됩니다. 조선 후기에는 대개 동일한 입향조를 가진 하나 이상의 동성 촌락 구성원들이 형성한 족적 결합체를 이끌었습니다. 조선 전기까지의 몇 세대의 내외손이 함께 거주하는 이성잡거의 동족 촌락에서 부계친 중심의 동성 촌락으로 바뀌는 변화까지 일으켰습니다. 족보도 부계 위주의 족보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였습니다. 부계친만 수록하며, 기록도 선남후여로 합니다.
 남귀여가혼에 대신하여 친영제가 본격화되어 혼인 후에 곧바로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제사는 조선 후기에는 적장자에 의해 주자가례에 따라 4대까지 제사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습니다. 집에는 가묘를 설치하여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재산 상속에서도 큰아들이 우대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딸이, 그리고 점차 큰아들이 외의 아들도 제사나 재산 상속에서 그 권리를 잊어갔고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ㄴ. 인구의 변동 : 조선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수시로 호구 조사를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인구에 관한 기본 자료는 원칙적으로 3년마다 수정하여 작성하는 호적 대장이었습니다. 인구 분포는 대체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50% 가량 살았으며, 경기도 강원도에 20%,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 30% 정도가 거주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인구 수는 건국 무렵에는 550~750만 명, 임진왜란 이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하였고, 19세기 말에는 170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2. 사회 변혁의 움직임
 1) 사회 불안 : 당시 향촌 사회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방식이 무너지고 수령이 절대권을 갖고 향리와 향임을 이용하여 부세를 거두도록 하였으므로 이들의 작폐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또 조선 후기 수취 형태로 토지에 부과하는 전정,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정, 그리고 환곡이 과중하게 부과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배층과 농민층의 갈등은 깊어지고,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농민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의식은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항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820년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18세기 이후 유망 농민층들이 명화적에서 활동하기도 합니다. 또 예언 사상이 유행해서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 정감록 : 정감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도참서입니다. 도참이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상징물인 도와 예언적인 언어인 참이 합해진 말로써, 왕조를 부정하는 가장 중심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이씨 왕조를 부정하고 정씨 왕조가 도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832년 영국은 상선 암허스트 호를 서해안 일대에 보내 통상을 요구하였고 1846년 프랑스는 신부의 처형에 항의하고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군함 3척을 하견할 것을 비롯해서 이후에도 여러 번 군함을 보냈습니다. 1853년 러시아는 군함 2척을 보내 동해안 일대를 측량한 후, 1860년 청과 북경 조약을 맺어 흑룡강 이북 땅과 연해주 지방을 차지함으로써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경했습니다.

 2) 천주교와 동학
 ㄱ. 천주교 :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명에 다녀온 사신이 서양의 자연과학 서적과 더불어 천주교에 대한 한역 서적을 얻어 왔습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도 서양 학문의 하나로서 이해되어 서학이라 불렸습니다. 주로 북인 계열의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8세기 후반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인물로 권철신, 권일신, 이벽, 정약종, 정약용, 이가환 등 주로 남인들이었으며 정조 8년(1784) 이승훈이 베이징의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다만 유학자 중에서도 천주교에 대해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자도 있었는데 18세기 말 안정복이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천학문답을 쓴 것이 대표적이 예시입니다.
 정부는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탄압하였습니다. 정조 9년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북경으로부터 사적 수입을 금하였습니다. 정조 15년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앤 윤지충을 사형에 처하였는데 이를 신해박해라고 합니다. 다만 남인에 우호적이었던 정조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기에 큰 박해는 없었습니다. 순조 1년 노론 벽파가 득세하자, 그들과 대립되어 있던 남인 시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탄압이 있었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합니다.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권철신 등 300여 명의 신도와 청나라의 신부가 처형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유배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서양 과학 기술의 수입도 거부되었습니다.
 * 황사영 백서 사건 : 황사영이 북경에 있는 프랑스인 주교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에서의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 달라는 서신을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외세 의존적 행위는 정부를 더욱 자극하여 교에 대한 박해가 가혹해지게 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면서 순조 31년에는 조선 교구가 독립됩니다. 하지만 헌종 5년 세도 정권 내 권력 다툼의 여파로 이루어진 기해박해 때에는 서울과 지방에 오가작통법을 세워 탄압합니다. 이 박해로 프랑스 신부 3인과 수십 명의 신도가 처형당했습니다. 또 고종 3년(1866)부터 1871년까지 이어진 병인박해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입니다.

 ㄴ. 동학 : 동학은 철종 11년(1860)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서학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창도하였습니다. 영, 블 연합군의 북경 침략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공은 동학 등장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철학으로서의 동학은 주기론에 가까웠습니다. 유, 불, 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천주교의 교리도 일부 받아들였으며,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습니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혹세무민)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습니다.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였습니다.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지식인층을 상대로 만들어진 것이고,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체로 되어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다시 교세가 커진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로 퍼져 나갔습니다.

 3) 농민의 항거
 ㄱ. 저항 유형 : 농촌에서 이탈하는 것은 지배층에 직접 저항하는 것이 아닌 점에서 소극적 저항이었습니다. 주로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국경을 넘어 간도나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학정의 금지를 요청하는 소청 운동으로, 때로는 정부와 탐관오리를 비방하는 방서, 괘서 사건으로 표출되던 농민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농민들은 삼정 이탈에 대해 관에 호소하는 정소 운동 등 합법적인 반대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와언은 수령과 이서들이 탐학한 일을 규탄하거나 현재의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내용을 말로써 백성들에게 퍼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괘서는 글로써 여론을 선동하는 일입니다.

 ㄴ. 홍경래의 난 : 서북 지역은 정부의 지역적 차별 때문에 사족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 청과의 대외 무역 통로로서 평양, 의주, 안주의 상인들이 대외 무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청과의 무역에서 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은의 채굴이 급속하게 늘어났고 금광도 개발되었습니다. 부민층은 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누르는 중앙의 간섭과 제한, 그리고 지나친 수탈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광산이나 수공업장에서 일하는 임노동자들도 농촌에서 몰락하여 도망친 자들이어서 지배층에 대한 적개심이 컸습니다.
 몰락 양반 홍경래를 비롯하여 지사 우군칙, 역노 출신으로 금광 경영과 상업으로 돈을 모은 이희저, 빈농 출신 김사용, 곽산의 진사 김창시 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산군 다복동에서 천여명의 병력으로 군사를 일으킨 홍경래 세력은 평안도민의 광범한 호응을 얻어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9읍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정주성에 들어가 대항하다가 거병한 지 4개월 만에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면밀한 계획과 장기간의 준비를 거쳐 조직적으로 전개된 봉기였습니다. 하지만 지방 차별 타파라는 명분이 전국적인 호소력을 갖지 못한 것이 한계입니다. 또한 향임, 군교 등 부호층에 가해진 수탈을 막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으므로 농민층을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걸지 못하였습니다.

 ㄷ. 임술 농민 봉기 : 철종 13년(1862) 경상도 단성에서 이해 처음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사족을 중심으로 한 고을민들이 환곡의 여러 폐단에 항의하면서 관아로 쳐들어 갔습니다. 전임 수령과 향리들이 환곡을 포탈하여 창고에는 남아 있지 않자 진주 목사 홍병원은 이를 채우려고 향회를 열어 토지 1결당 6냥 5전씩을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우병사 백낙신은 우병영의 환곡 부족분 6만 냥 어치를 집집마다 나누어 물리기로 하였습니다. 그 해 향임 유계춘의 지도 아래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죽창과 곤봉을 들고 일어나 관아를 부수고 농촌의 부민들을 습격한 다음에 스스로 해산하였습니다.
 3월에 접어들면서 다른 지역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5월까지 경상, 전라, 충청도 일대를 휩쓸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이해 가을부터 이듬해 1월 말 무렵까지 세 차례에 걸쳐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함경도 감영이 있는 함흥, 경기도 광주를 비롯하여 경상도 신녕, 연일, 창원, 남해에서도 계속 농민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농민들의 사회 의식이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체제도 점차 무너져 갔습니다.
 정부에서는 안핵사나 선무사를 파견해 난을 수습하고 민심을 회유하기에 힘썼습니다.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생각해 삼정을 바로 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놓았으나 삼정이정청은 얼마 가지 않아 폐지되었습니다. 이는 정부의 삼정 개혁책이 토지 개혁과 같은 근본적인 것이 못되고 미봉책에 그쳤기 때문에 반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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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대 태동기의 정치


 1. 조선 후기 정치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 사림들은 처음에는 상대 붕당을 소인당으로 자기 붕당을 군자당으로 주장하였으나, 선배 사림이 물러간 뒤에는 붕당을 모두 군자당으로 보고 붕당 간의 견제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습니다. 인조 이후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습니다.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집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어떤 정책을 논의할 경우, 각 붕당은 가 정책이 이론적으로 타당한지 검토하고,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하면서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수렴된 여론을 공론이라고 합니다. 중앙에서는 공론이 중시되면서 합좌 기구인 비변사와 언론 기관인 3사의 기능이 중시되었습니다. 삼사는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해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집중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산림이 출현합니다. 산림은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서원이나 향교는 지방 사족의 의견을 모으는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다만 붕당이 적극적으로 내세운 공론은 백성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배층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공론은 정치의 활성화와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으며, 정치 세력 간의 상호 비판과 견제 기능도 가졌습니다.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서인과 남인은 모두 학파적 결속을 확고히 한 정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격렬한 주화, 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효종 때는 송시열, 송준길, 김집, 권시 등 서인이면서도 재야에서 학문을 닦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젊은 산림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고 허적, 허목, 윤선도 같은 저명한 남인 인사들 역시 등용하였습니다. 서인은 재상 중심의 권력 구조를 지향하고, 재무 구조의 개선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비 속량과 서얼 허통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또 청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에 주력하여 호위청, 총융청, 수어청, 정초군 등의 새로운 부대를 설치했습니다. 남인은 고대 제왕의 수준으로 왕권을 강화할 것과 삼사의 정책 비판 기능에 큰 비중을 두려고 하였습니다. 또 농촌 경제의 안정에 치중하여 수취 체제의 완화와 중소지주 및 자영농의 안정을 중요시하고, 서얼 허통이나 노비 속량 등 신분제 완화에 비교적 소극적이었습니다.
 * 예송 논쟁 :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ㄱ. 기해예송 : 효종의 사망에 대하여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복 기간이 쟁점이었습니다. 서인 송시열, 송준길 등은 천하동례(천하의 모든 사람은 같은 예의 적용을 받는다)의 원칙에 입각했습니다.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라고 하여 1년상을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남인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은 천하부동례에 의해 왕실의 예는 결코 사족들의 것과 같을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복상 기간을 제시하여 3년상을 주장하였습니다. 결코 서인이 승리하였고, 허적을 비롯한 소수의 남인이 참여하였습니다.

 ㄴ. 갑인예송 : 현종 말년 효종비가 사망함으로써 역시 조대비의 상복 기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송시열 등 서인의 9개월과 남인의 1년상이 대립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권력이 교체되었습니다.

 숙종 즉위 초에 집권한 남인은 허적, 윤휴 등 온건한 탁남이 주동이 되어 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 기관을 부활시키고, 그 본진으로서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을 축조했습니다.
 ㄱ. 경신환국 : 숙종 6년(1680) 남인 영수 허적이 대흥산성의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 윤휴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남인들도 축출했습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합니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이 재기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 즉 민생 안정과 자치자강을 강조하였습니다.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주장하였습니다.

 ㄴ. 붕당 정치의 변질 : 겉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공존 관계까 깨진 것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17세기 후반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일단 전란으로 황폐화되었던 농경지도 거의 복구되었고 농법의 개량으로 생산력도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장시의 발달과 화폐의 전국적인 유통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또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은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양반들의 향촌 지배가 쉽지 않았고, 그것은 붕당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숙종 대에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났습니다. 환국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된 붕당은 상대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정국을 독점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이들은 상대 세력을 역모죄로 몰아내었기 때문에 사사가 반발하였고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운영하는 것이나 왕위 계승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배층 사이에는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현저해졌습니다. 사림의 공론을 대변하는 것으로 존중되었던 삼사와 이조낭관은 환국이 거듭되는 동안 자기 당의 이익을 직접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정치적 비중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영향을 정권은 일부 벌열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고 양반층은 분화되었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양반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갔습니다.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양반층은 자기 도태를 거듭하였습니다. 집권 세력은 집권의 명분 합리화와 자파 정론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을 위하여 일반 사림의 광범한 지지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에 자파 인물을 봉사하는 서원을 경쟁적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숙종 대에 설립된 서원은 140여 개에 달하는데, 봉사 대상 인물도 자격이 되지 않는 학문인으로 보기 어려운 인물 등이 선정되었습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해졌습니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으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환국을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함에 따라,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습니다. 정치 권력은 점차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었으며, 언론 기관이나 재야 사족의 정치 참여가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졌습니다.
 숙종 15년 희빈 장씨가 출산한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습니다. 그 동안 노론의 핵심 인물이었던 송시열, 김수항 등이 보복을 받아 처형당하였습니다.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숙종 20년 폐비 민씨가 다시 복위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때부터 남인은 거의 재기 불능의 상태로까지 전락하고 맙니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숙종 23년(1697)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 오던 광대 출신 장길산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어수선했고, 서울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부대와 연결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한편 삼남지방에서 양전사업이 완료되어 총 66만 7800결을 얻고, 전국의 인구는 68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 무고의 옥 : 숙종 27년(1701)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그가 죽도록 저주를 하였다는 혐의로 사사당하였습니다.
 * 병신처분 : 숙종 42년 정국을 주도하는 소론의 영수로 인정받던 윤증의 부친 윤선거문집의 인쇄 원판을 헐어 없애도록 하고, 이듬해는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관직을 추탈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소론이 퇴조하고 노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 정유독대 : 숙종은 관례를 무시하고 승지와 사관들도 배석하지 못하게 한 채 좌의정 이이명만을 불러 단 둘이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그 후 숙종은 하교를 내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습니다.
 * 신임옥사 : 숙종 사후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소론과 남인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경종의 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이 날카로워진 상황에서 노론을 내치고 노론 4대신 김홍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죽였습니다.

 2)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ㄱ. 영조의 탕평책 : 영조 4년(1728) 소론과 남인이 힘을 모아 '노론이 영조를 왕으로 세우려고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무장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인좌 세력은 청주를 점령하고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결국 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 난에 가담했던 소론계와 남인계 급진파는 이후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이는 영조로 하여금 붕당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성하지 않고서는 군신의리가 지탱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했습니다. 또 정부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 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 갔습니다.
 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습니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완론 탕평이라고 합니다. 영조는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또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으며 이조 전랑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주던 관행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주요 사건으로는 나주 괘서 사건(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이 권력을 확고히 굳힙니다.)과 임오화변(사도세자...)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영조는 일반민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고, 궁 밖에 자주 나가서 자주 민의를 청취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행차 도중의 왕을 직접 만나서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상언, 격쟁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영조 26년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습니다. 편찬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속대전, 속오례의, 속병장도설, 동국문헌비고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속대전은 왕조의 통치 규범을 다시 정비한 것이고, 속오례의는 국조오례의의 속편이었습니다. 동국문헌비고는 정치, 경제, 문화 등 국가 여러 부분의 문물을 포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습니다. 다만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또 신하들 사이에는 탕평책에 대한 찬반을 놓고 새로운 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노론이나 소론 할 것 없이 탕평책 지지자들에게는 탕평당이라는 호칭이 새로이 붙었습니다.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탕평당의 핵심들이 왕실과 혼인 관계를 가져 새로운 세력가로 부상했습니다.

 2) 정조의 탕평책 :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준론 탕평이라고 합니다.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고,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습니다.
 주요 기구로는 일단 규장각이 있습니다. 정조 즉위년(1776) 창덕궁 안에 세운 규장각은 당초 역대 왕의 문헌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적인 기능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기능이 통합적으로 부여되고 정치적 선도기구로서의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또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 하급 관리(당하관 관료)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였습니다. 이를 초계문신제라고 합니다. 정조는 조선 후기 국왕으로서 군영 설치를 직접 주도하였는데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고 병조 밑에 두었습니다. 이것으로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일원화한 것입니다. 또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사림이 주관하던 군현 단위의 향약을 수령이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암행어사 제도를 통해 지방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성장하는 사회 세력과 발전의 성과물에 대한 동태적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화성 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격쟁과 상언을 접한 뒤 억울한 일을 많이 해결해주었습니다. 서얼을 등용하고, 노비추쇄를 금지하는 등 노비에 대한 차별도 완화해주었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정조는 전통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였습니다. 중국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강희제 때 편찬한 5022권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였습니다. 편찬 사업으로는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해 경국대전을 증보한 대전통편을 편찬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정치를 스스로 기록하여 매일매일 반성하는 전통을 세워 세손 때부터 일성록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왕이 된 뒤에는 규장각의 신하들이 왕을 대신하여 주요 정사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외에도 청과의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가,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습니다. 정조의 방대한 문집인 홍재전서도 정조 사후에 규장각에서 간행되었습니다. 문헌 편찬 사업과 병행하여 활자도 개량되어 한구자, 정리자 등이 새로 주조되었습니다.
 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며 기존의 각 정치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탕평책은 기존 정치 세력의 참여 기반을 좁혔으며,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운영은 새로운 정치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정치는 차츰 보수화되어갔으며 관료, 외척 가문들이 정치 세력으로 팽창해 나갔습니다. 또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정치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3) 세도 정치 : 세도 정치는 종래의 일당 전제마저 거부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로서 정권의 사회적 기반이 결여되었습니다. 중앙 정치를 주도하던 정치 집단은 소수의 가문 출신으로 좁아지면서 그 기반이 축소되었습니다. 세도 정권은 안동 김씨 이외에도 정조와 가까웠던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경주 김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반남 박씨 같은 명문 양반 가문과 혈연적으로 깊은 연결을 맺으면서 정권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다 정조의 죽음으로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장인 김조순과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순조 말년부터 헌종 때까지는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가, 철종이 즉위하자 다시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세도가들은 원래 영, 정조 시대의 왕조 증흥에 기여를 했던 명문가들로서 규장각에서 학문을 닦은 인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을 잡은 후 차츰 고증학에 치우쳐 개혁 의지를 상실해버리고 맙니다.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계는 산유박해를 일으켜 규장각을 통해 정조가 양성한 인재들을 대거 축출 또는 제거하는 한편 장용영도 혁파했습니다.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습니다. 비변사는 세도 정치의 중심 권력 기관으로서 당상자리를 차지한 인물들이 핵심 정치 집단을 형성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의정부와 6조 그리고 삼사는 고유 기능을 상실하고 행정 실무를 집행하는 기구로 변질되었습니다. 언관의 독자적인 언론 활동은 매우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세도 정권은 비판 세력이 없었으므로 권력의 행사를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세도 정치기에는 붕당은 물론, 탕평파와 반탕평파 같은 정치 집단 사이의 대립적인 구도도 없어졌습니다. 중앙의 군사력은 훈련도감 중심으로 대폭 축소하여 그 군권 장악만으로도 정권을 쉽게 유지시킬 수 있는 형태로 정치가 이끌어졌습니다. 중앙 권영들은 전반적으로 비변사의 직접적인 통제 속에 들면서 군사력의 실제적인 보유 및 가동은 훈련도감 하나에 한정시켜 그 대장직을 세도 일족의 핵심이 확고하게 장악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습니다. 또 지방 재정을 담당하는 수령직의 매매가 성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절대권을 가진 수령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습니다. 자연 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2. 통치 체제의 변화
 1) 비변사의 강화 : 비변사는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 왜란의 대책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여진족과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전시에만 설치된 임시 관청이었고 국경지대의 일을 잘 아는 관원을 중심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 이후 비변사는 정규 관청이 되어 국경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 군무까지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구성원은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습니다. 임진왜란때는 전란 대처 등 군국기무를 총령하고 국정을 총괄하였습니다. 군사 업무와 함께 여러 행정 부서의 직무도 통할하게 되는 국가 최고 관부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숙종 25년 이후 비변사는 교외 교역을 포함한 외교 담당이나, 무역 재정 지방 행정 관계 등의 사안도 처리하였습니다. 19세기에는 인사, 재정 등 내정의 핵심 사안이 비변사에 의해 장악되고, 요직 당상이 외척이나 벌열 세력에 의해 독점되는 현상으로 왕권 제약이 노출되었습니다.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지고 왕권은 약화되었습니다. 고종 1년(1864) 대원군은 의정부와 비변사의 사무 한계를 규정하여 비변사는 외교와 국방, 치안 관계에만 맡아 보게 하고, 나머지 사무는 모두 의정부에 넘기도록 하였습니다. 군무는 삼군부로 이관시켜 비변사를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시켰습니다.

 명종 10년 이전에는 도합 20명 이내로 구성되었으나 세도 정치 말기의 경우 서리까지 포함한 비변사 구성원의 총인원은 100여 명을 넘는 방대한 조직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구성원은 3정승을 비롯하여 공조를 제외한 6조의 판서와 참판, 대제학, 각 군영의 대장, 강화 유수 등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비변사에서 매일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2) 군사 제도의 변화
 ㄱ. 중앙군 : 5위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선 초기의 중앙군은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제가 일반화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어이없는 패전을 경험한 조정에서는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한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습니다. 17세기에는 훈련도감에 이어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군영이 더 설치되었습니다.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 충용청, 수어청 등이 설치되었고, 숙종 때에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어 17세기 말에는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습니다.
 훈련도감에서는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병서인 기묘신서의 절강병법에 의해 포수, 사수, 살수의 전문적인 삼수병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삼수병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이었습니다. 삼수병에게 매월 급료를 지급하기 위해 삼수미세를 징수하였습니다. 이는 수도의 핵심 군영으로서 어영청, 금위영과 더불어 궁성 수비 또는 수도 서울의 방위를 책임지게 하였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 어영청 : 효종 3년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어영청을 개편하여 북벌의 선봉군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각 도의 정군들이 교대로 번상하여 근무하게 하고 보인을 설정하여 경비를 충당했습니다.
   총융청 :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계기로 서울과 경기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경기도 일대의 속오군을 중심으로 편제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총융청에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수어청 : 인조 4년 남한산성에 수어청이 설치됨으로써 경기도의 수도 남부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인조 5년 정묘호란 후 각종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금위영 : 숙종 8년 도성 수비를 목적으로 금위영을 설치하였습니다.

 5군영은 일정한 계획하에서 일률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소속 군사의 성격 또한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상주하는 상비병인 경우도 있었고, 각 도에 거주하는 정군들이 번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난 후 진행되는 신분제의 붕괴와 부역제의 해이, 그리고 수취 체제의 변동은 번상병제의 유지를 어렵게 하였고 상비병제가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 서인 세력은 자신들의 정권을 지켜 줄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을 필요로 하였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투어 군영을 설치하고 그 운영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각 붕당은 자신의 세력을 군영의 대장으로 삼아 실질적으로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군영을 정권 유지의 물리적 기반으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ㄴ. 지방군 : 지방군의 방어 체제 역시 변화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 실시되던 진관 체제는 많은 외적의 침입에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에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에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으로 복구하고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제하는 속오법 체제로 정비하였습니다.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양반이 노비와 함께 속오군에 편제되는 것을 회피함에 따라 상민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인조 5년 속오군의 지휘를 수령 중심에서 전문적인 영장 중심으로 바꾸는 제도가 설립되었습니다. 영장은 계급상으로 수령의 위이며, 조련권과 행정권을 구분하여 영장은 속오군에 한하여 관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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