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대 태동기의 경제
1. 수취 체제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습니다. 게다가 굶주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양반 비챙은 정치적 다툼에 몰두하여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은 불만을 드러내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습니다.
1) 전세 제도
ㄱ. 영정법 : 인조 12년 정부는 연분 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켰습니다. 이러한 개편으로 전세의 비율이 이전보다 다소 낮아졌습니다. 다만 영정법은 대다수의 농민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났습니다. 전세를 납부할 때에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에 대한 보충 비용 등의 부과세가 함께 부과되었기 때문인데, 그 액수가 전세액보다 훨씬 많아 때로는 전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ㄴ. 양척동일법 : 효종 4년 수등이척법은 폐지되고 통일된 기준 척으로 1등 전척을 삼되 결부의 크기를 달리하는 방식이 채택되었습니다. 면적을 표준으로 삼아 동일한 면적에서의 수확량을 계산하고 1등전은 100부, 6등전은 25부로 정하여 각각 등급을 나누었습니다.
2) 공납제도 : 당시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던 것은 공납이었습니다. 특히 방잡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을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어 대동법이 실시되었습니다.
ㄱ. 대동법 실시 :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10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광해군 원년에 이원익, 한백겸 등의 주장에 따라 방납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에 최초로 시행되었습니다. 중앙에 선혜청과 지방에 대동청을 두고 이를 관장했습니다. 인조 2년 조익의 건의로 강원도에서도 실시되었습니다. 효종 2년 김육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실시하였고, 효종 9년 정태화의 건의로 전라도에 실시하였습니다. 숙종 34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황해도까지 전국에서 실시되었습니다.
100년이나 걸린 이유는 일단 대동법이 실시되면 토지 면적에 따라 공납이 차등적으로 부과되므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양반 지주층은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경주인, 토호 등 종래 방납인들은 공인으로 다시 뽑힌다 하여도 중간 취득 이익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공납을 토지세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전국적인 양전이 철저히 실시되지 못한 것이 다른 이유입니다.
ㄴ. 대동법 내용 : 대동법에서는 소유하고 있는 토지 1결마다 미곡 12두를 봄, 가을로 6두씩 징수했습니다. 대동법은 공납을 전세로 바꾼 까닭에 토지가 많은 부호에게는 불리하고 토지가 적거나 없는 농민에게는 유리하여, 농민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습니다. 국가는 전세 수입의 부족을 이로써 보충하여 국가 재정이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지역에 쌀 가격이 차이가 있고 운송 문제가 있어서 목면, 마포, 전화로 바꿔 내기도 하였는데, 이를 환봉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아울러 납세자의 요구에 따라 잡곡으로도 대납하였는데, 이를 대봉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납부한 미곡들을 중앙의 선혜청에 모내는 상납미와 지방에 유치해서 지방관아의 경비에 충당한 유치미로 나누어 사용되었습니다. 선혜청은 숙종과 영조 때에는 진휼청과 균역청을 각각 아우르게 되어, 호조를 능가하는 조선 최대의 재정기관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또 조세곡 운송량이 늘면서 경강선운업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국가는 선혜청에서 징수한 쌀, 포, 돈을 공인에게 공가로서 지불하여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습니다.
* 공인 : 공인은 관수품 조달 상인으로서 정부의 비호를 받는 특권 상인이었습니다. 대동법 실시 이전부터 각 관청에 공물을 조달하고 있던 경주인이나 서울의 시전상인, 장인들이 공인이 되었습니다. 공인들의 활동으로 상인 자본의 규모가 커져 도고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ㄷ. 영향과 한계 :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공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가 성장하고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공인의 주문에 따라 생산하는 수공업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또 경상도의 삼랑진,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지가 미곡 집산지로서 각광을 받아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은 농촌 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 질서와 사회 체제의 이완, 해체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만 매년 정기적으로 바치는 상공은 없어졌지만, 왕실에서 쓰는 진상이나 별공은 그대로 남아 현물 징수가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납미의 수요가 매년 증대되기 시작하자 수령들은 부족한 경비를 점차 농민에게 부담시켰다는 한계 역시 있습니다.
3) 군역 제도
ㄱ. 양역의 모순 : 군적수포제로 인해 지방 수령이 군역 부담자로부터 번상가로 포를 징수하였습니다. 이때 거둔 포를 중앙에 보내면 병조는 군사력이 필요한 각 지방에 일정한 양을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거나 상비병제를 채택하도록 하였습니다. 군포를 징수하는 기관은 5군영만이 아니라 중앙의 관청 혹은 지방의 감영, 병영 등도 각각 군포를 배당 받아 거두었습니다. 양정들이 부담하는 군역도 반드시 2필역으로만 고정되지 않아 2필 혹은 3필을 내야 하는 등 일률적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5군영의 설치와 북벌 준비에 따른 군역의 강화가 군역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정부는 재정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군포의 액수를 증가시켰으며 군포를 수납하는 과정에서 수령 아전들도 농간과 횡포를 부렸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숙종 때 본격적으로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군제변통론이 크게 거론되었습니다. 경종, 영조 대에 양역의 폐단이 매우 심화되었으며 이를 수습하는 문제는 절박해졌습니다.
ㄴ. 균역법 : 군포를 1년에 1필로 줄이면서 균일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경감된 부분은 국가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보충책으로는 일단 선무군관포가 있는데 이는 양인이면서도 군포 부담에서 빠지던 양인의 상층을 선무군관으로 편성해서 다시 포를 받아낸 것입니다. 또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토지 1결당 쌀 2두를 부과한 결작이 있으며 전국의 어장과 선박에서 거두는 어염선세는 종전에 궁방에 속해 있던 것이었으나 균역법 실시로 국가 세원이 되었습니다. 또 전국의 탈세전을 적발해서 세금을 받아낸 은여결세도 있습니다.
그 결과 군포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자 농민 부담은 한때 가벼워졌고 농민의 피역 저항도 소강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미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정부가 책정하는 양정의 수가 급격히 증가함으로써 농민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습니다.
4) 삼정 체제
ㄱ. 삼정 :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국가 재정 체계가 조용조 체제로부터 전정, 군정, 환곡이라는 삼정체제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전정 : 삼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토지세 징수를 말합니다. 전세(4두), 대동세(12두), 삼수미세(2.2두), 결작(2두) 등을 비롯한 많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 초에 토지에 부과된 것은 전세 정도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부세들이 토지에 집중되면서 전결세의 항목이 많아졌습니다.
군정 :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 부담은 포 2필에서 1필로 줄었으나 포 1필이 쌀 6말에 해당되어 그 부담이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곡 : 환곡은 본래 빈민 구제책으로 춘궁기에 국가의 곡식을 농민에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10%의 이자를 가산하여 받아들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환곡의 진휼 기능은 국가 재정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중앙의 각 아문은 물론 지방의 감영, 병영, 군현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환곡을 설치, 운영하여 주요 재정원으로 삼았습니다.
ㄴ. 삼정의 문란
전정 : 대동미, 삼수미 등 무려 43개 종류의 잡세가 전세에 부과되어 전정의 문란을 심화시켰습니다.
군정 : 군포의 총액을 채우기 위해 일시불로 걷고(마감채), 젖먹이 아이(황구첨정), 죽은 사람(백골징포), 노인(강년채), 이웃(인징), 친척(족징)으로부터 군포를 받아냈습니다.
환곡 : 환곡은 19세기에 가장 문란했습니다. 본래 군현의 창고에 보고나된 환곡의 원곡 가운데 반은 창고에 두고 나머지 반만을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가면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고 창고 안의 모든 곡식이 농민에게 분배되었습니다. 반작이라 하여 출납을 허위 보고하여 잉여분을 차지하고, 가분이라 하여 창고에 남은 곡식까지 대출하여 이익을 취하고, 허류라 하여 창고에 없는 곡식을 있는 것처럼 장부에 꾸미고, 분백이라 하여 반은 겨를 섞어서 1석을 2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2. 서민 경제의 발전
1) 농업
ㄱ. 농업 복구 정책 : 양란으로 황폐된 농촌을 재건하려는 운동은 국가 사업으로 나타나서 호적과 산업이 재정비되고, 면리제와 5가작통이 실시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전결의 전결 수는 전쟁 이전의 1/3로, 인구는 1/10 이하로 줄어들었는데, 가장 피해가 컸던 경상도는 전쟁 전의 약 1/6으로 농지가 감소되었습니다. 토지의 황폐화와 토지대장의 소실 등이 그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전후에 계속하여 진전이 개간되고 양전 사업이 실시되면서 토지 결수는 점차 늘어났습니다.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는 간척 사업이 활기를 띠어 농경지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광해군 때에는 54만 결, 인조 때에는 120만 결, 숙종 때에는 140만 결 그리고 영, 정조 때에는 최고 145만 결까지 증가하였습니다.
토지 결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수세지는 전결 수의 약 60%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나머지는 궁방전이나 관둔전 등 면세지였습니다. 왕실은 내수사를 통하여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고 장리로 불리는 고리대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특히 왜란 후에는 바닷가의 황무지를 불하받거나 민전을 사들여 수만 결의 궁방전을 차지하였습니다. 각 관청도 경비 조달을 위하여 둔전을 확해하여 갔습니다.
ㄴ. 농촌 경제의 변화 : 농민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습니다.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습니다.
농민들은 주로 작은 규모의 보를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서 물을 확보하였습니다. 현종 3년 제언사가 설치되고, 정조 2년에 제언절목이 반포되어 국가의 지원 하에 제언, 보, 저수지 등이 새로이 축조되거나 보수되었습니다. 18세기 말에는 큰 저수지(제언)가 3590개 소, 작은 저수지(보)가 2265개 소, 합하여 저수지의 총수가 약 6천 개에 달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수원의 서호, 김제의 벽골제, 홍주의 합덕제, 연안의 남대지 등은 가장 큰 저수지로 꼽혔습니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경영하는 광작이 성행했는데, 광작은 지주도 할 수 있고, 병작인도 할 수 있었습니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지주는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접 경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소작 농민은 소작지를 잃기는 쉬워지고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밭에서도 밭고랑과 밭이랑을 만들어 밭고랑에다 곡식을 심는 이른바 견종법이 보급되어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견종법은 이랑이 바람을 막아 주고 습기를 머금기 때문에 작물이 추위와 가뭄도 견딜 수 있게 해주어 수확량이 많았습니다. 또 보리(또는 밀)와 콩(또는 조)을 매년 두 번씩 재배하는 그루갈이(윤작법)가 성행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퇴비, 분뇨, 석회 등 거름의 종류를 다양하게 개발하였고, 거름의 양도 풍부해졌습니다. 거름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개선되었습니다. 또 18세기 이후 철제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농기구가 제작되어 쟁기, 써레, 쇠스랑, 호미 등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논농사에서는 소를 이용한 쟁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생산력이 보다 증대되었습니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업 분야에서도 상품화를 전제로 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습니다.
쌀 :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습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습니다.
인삼과 담배 : 인기 있는 상업 작물로서 재배되었습니다. 수출 상품으로 인기가 높았던 인삼은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각지에서 널리 재배되었고, 담배도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전래된 뒤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재배되었습니다.
채소 : 서울 근교의 왕십리, 송파 등지에서는 인구가 늘어난 서울 시민을 상대로 하여 채소 재배가 성행하였습니다.
면화 : 경상도를 비롯한 삼삼 지방과 황해도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었습니다. 면화는 당시 서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옷감의 원료로서 그 수요가 많았습니다.
구황 작물 : 전란을 겪으면서 기근을 대비한 구황 작물의 필요성이 높아져서 고구마, 감자, 고추, 호박, 토마토 등 새로운 작물이 널리 재배되었습니다. 고구마는 1764년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일본에서 가져오고, 감자는 청에서 종자를 들여왔습니다.
농업의 발달에 따라 많은 농사가 출간되었습니다. 신속은 농가집성에서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습니다. 또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 재배법뿐 아니라 채소, 과수, 원예, 양잠, 축산 등의 농업 기술을 소개하는 농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박세당의 색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이 편찬되었습니다.
ㄷ. 양반과 농민 생활
양반은 양난 이후 토지 개간에 주력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습니다.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이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장에 팔아 이득을 남겼습니다. 또 토지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토지 매입에 더욱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불리는 지주도 나타났습니다. 양반 중에는 물주로서 상인에게 자금을 대거나 고리대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변동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하는 양반도 나타났습니다.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 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경영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일반화되었습니다.
한편 소작농이라도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작권을 인정받고 소작료도 일정 액수만 내게 되면서 근면하고 시장 경제를 잘 이용하는 농민은 점차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습니다.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습니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였습니다.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황해도의 수안,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이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병작 농민이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는 수확의 반을 나누는 타조법이 그대로 관행되었으나, 18세기 말경부터는 전라도 등 일부 지방의 궁방전, 역둔토에서 정액세인 도조법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타조법 : 타조는 지대의 액수를 미리 정하지 않고 지주와 작인이 수확량의 분배율만 정해 두었다가 매년 생산물의 양을 보아서 그 비율에 따라 분배하였는데, 대체로 수확물의 1/2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타조법은 수확의 다과에 따라 매년 소작료가 달랐기 때문에 수작인의 토지 경영에 대한 지주의 감독과 간섭이 심하여 소작인의 자유로운 토지 경영을 불가능하게 하고 소작인들의 생산 의욕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이며 경제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마음대로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작 농민은 좀 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습니다. 소작인의 저항이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낮추거나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 도조법 : 도조법은 도지권을 가진 전호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도지권은 작인이 지주로부터 토지를 개간했거나, 제방을 쌓거나 매수하였을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도지구너을 가진 작인은 그 토지를 매매할 수도 있었습니다.
소작료를 미리 협정하고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입니다. 도조는 대체로 수확량의 1/3을 표준으로 하여 정해졌으므로 타조보다 작인에게 유리하고, 또 일년 수입을 예상하여 계획된 농업 경영이 가능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도조법의 실시로 지주와 전호 사이는 신분적 관계보다 경제적 관계로 바뀌어갔습니다.
2) 수공업과 광업
ㄱ. 수공업 : 관청 수공업이 중심이 된 조선 초기의 수공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적으로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관영 수공업에서는 무기, 종이, 옷, 자기, 비단, 유기(놋그릇), 화폐 주조 등 국가의 수요가 많은 분야에서는 뒤늦게까지 관청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그것도 점차 민영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국가는 대규모 건축 사업이 있을 때는 장인을 일단 노동자로 고용하여 물품을 제조하게 하였습니다. 정조 때 화성을 건설하면서 수천 명의 장인을 고용하여 근무 날짜에 따라 일당을 지부한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집니다. 16세기 이후 공장들은 가급적 등록을 기피하고, 또 정부의 재정 사정도 악화되어 조선 후기에는 관영 수공업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공인으로부터 관수품을 사들이고, 공인은 수공업자에게 주문하여 관수품을 제조, 구입하였습니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에 비해 경쟁력도 높았습니다. 민간 수공업자의 작업장은 흔히 점으로 불리었는데 점은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사장의 작업장으로, 철기 수공업체는 철점, 사기 수공업체는 사기점이라 하였습니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작업장과 자본의 규모가 소규모여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대부분 공인이나 상인에게 주문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습니다. 선대제 수공업이라고 합니다. 주로 종이, 화폐, 야철, 자기 등과 같이 소비 규모가 크고 막대한 원료를 필요로 하는 물품은 대상인이 원료와 대금을 선대해 주고 생산된 물품을 사들였습니다. 그들을 물주라고 불렀습니다. 물주의 등장은 17~18세기 수공업의 특징적인 현상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제조 규모가 컸던 것은 솥과 놋그릇으로서, 경기도 안성과 평안도 정주의 납청은 놋그릇 생산지로 가장 유명하였습니다. 이 곳의 수공업자들은 자기의 자본으로 공장을 설비하고 원료를 구입하였으며,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에 의해서 물품을 제조하였습니다.
농촌에서는 보통 자급자족을 위한 부업의 형태로 수공업이 행해졌지만 점차 소득을 올리기 위하여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었고, 더 나아가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가도 나타났습니다. 농촌에서는 주로 옷감과 그릇 종류가 생산되었습니다.
ㄴ. 광업 :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광하였습니다. 광산 경영은 정부가 수요 액수를 일률적으로 정하여 부과하면 해당 고을의 수령이 농민들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하여 채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부역 노동은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고, 이로 인하여 때로는 농사철을 놓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6세기 이래로 농민들은 광산에 부역으로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악화되고 있는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민간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 혈주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가 있었지만 물래 채굴하는 경우도 성행하였습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농민들이 광산에 너무 모여들어 농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고려하여 공개적인 채취를 금지하고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광산 개발이 이득이 많았으므로 금광, 은광을 몰래 개발하여 이른바 잠채가 날로 번창하여 갔고, 큰 자본을 모은 이도 나왔습니다.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거의 70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서도 평안도 단천과 경기도의 파주, 교하는 특히 유명하였습니다.
18세기 말에는 상업 자본의 채굴과 제련이 쉬운 사금 채굴에 몰리면서 금광의 개발도 활발해졌습니다. 금광은 평안도의 자산, 성천, 수안이 유명하였습니다.
금, 은광만큼은 활기를 띠지 않았으나 놋그릇과 무기 그리고 동전 주조의 원료로서 철광과 동광 개발이 촉진되고, 화약 제조의 원료인 유황 광업도 일어났습니다.
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1) 상업
ㄱ. 서울 :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 민영 수공업의 발달,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도시 유입이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더욱 촉진하였습니다.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으며, 처음에는 공인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조선은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과 시전 상인에게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이라 하여 금지시켰습니다. 전안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 임의로 해당 물종에 관한 상행위를 벌일 경우 시전은 난전으로 규정하여 이들의 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유 물품까지도 압수, 혹은 거래 물품에 대한 일정액의 수세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서울의 경우 시전 상가 외에 남대문 밖의 칠패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 등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 신해통공 :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습니다. 사상들은 육의전 상품이 아닌 것은 자유스럽게 관상과 경쟁하면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시전 이외의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ㄴ. 지방 :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대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를 토대로 하였습니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장시 가운데서 광주 송파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창원의 마산포장,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대구, 마산, 안동, 황해도의 은파, 강원도의 대화장(평창) 등이 유명하여 새로운 상업 도시로 성장해갔습니다. 장시는 지방민의 교역 장소로 인근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습니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장시는 시장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음식을 즐기며, 각종 놀이도 구경하는 축제의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 보부상 :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한 행상으로서,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일정 지역 안이나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활동하였습니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습니다. 상인들은 포구를 거점으로 선상, 객주, 여각 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습니다.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서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 상인이 대표적인 선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습니다.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습니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습니다.
ㄷ. 도고 상업 : 조선 후기에는 도고라고 불리는 독점적 도매 상업이 성행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보편적인 상업 형태인 도고 상업의 발달은 유통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상업 자본의 축적을 가져왔으며, 그 자본의 일부는 정치 자금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다만 그로 인해 많은 영세 상인의 몰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상품 판매의 독점 행위를 이용하여 물가를 올리기도 하고, 국가에 대한 탈세 행위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도고 상인은 관상인 시전 상인과 공인 가운데서 출현하였고, 사상 중에서 서울의 경강 상인, 개성의 송상, 동래의 내상, 의주의 만상, 평양의 유상 등은 대표적인 거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2) 대외 무역의 발달 :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기를 띠었습니다.
ㄱ. 상인 : 국제 무역에서 사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상인이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은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이었습니다. 특히,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습니다.
ㄴ. 청과의 무역 :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과의 무역은 사신 무역, 특히 역관 무역이 중심을 이루다가, 임진왜란 중 식량을 확보하려고 중국과의 사이에 중강을 중심으로 개시가 이루어지면서부터 민간 무역이 열렸습니다. 중강 이외에 회령, 경원 등에서도 열렸고 참가하는 상인과 교역 상품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두 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개시 무역은 제약성이 많아 점차 두 나라 상인 사이에 공식적인 교역량을 넘은 사무역이 성행하면서 후시 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모자, 말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가죽 등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로는 개성 인삼이 대종을 이루었습니다.
ㄷ. 일본과의 무역 :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까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에서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조선은 인삼, 쌀, 무명 등을 수출하고, 청에서 수입한 명주실과 각종 비단 등을 넘겨주는 중계 무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3) 화폐유통
ㄱ. 화폐 보급 :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인조~효종 시기에는 화폐의 유통에 힘써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그 쓰임새를 살펴보고, 효종 때에는 이를 널리 유통시켰습니다. 그러다 17세기 말 영의정 허적의 제의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습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환, 어음 등의 신용 화폐가 점차 보급되어 갔습니다. 이는 이 시기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과 상업 자본의 성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ㄴ. 영향 : 금속 화폐의 보급은 상품 유통과 교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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