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항일 운동
1. 191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
1) 국내 비밀 결사 :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습니다.
ㄱ. 특징 : 1910년대의 민족 운동을 주도한 것은 도시의 중산층과 교사, 학생, 유생 등 지식인층이 중심이었으며, 기독교, 불교, 대종교, 천도교 등 종교 단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은 대체로 무력 항쟁을 기본으로 하여 독립군을 직접 양성하거나 지원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한편 독립 후의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측과 주권재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측의 노선 차이가 있었습니다.
ㄴ. 의병 계열
* 독립의군부(1912) : 호남의 척사 유림인 최익현의 제자 임병찬이 고종의 밀칙을 받아 국내의 잔여 의병 세력과 유생을 규합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단체로서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일본의 총리 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끝까지 저항할 것임도 알렸습니다.
민단 조합(1915) : 이강년 의병 부대에서 활동했던 이동하, 이은영 등이 민단 조합을 만들어 독립 전쟁을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발각되었습니다.
ㄷ. 계몽 운동 계열
조선국권회복단 : 경상도 지방에서는 대종교에 귀의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유생들이 시회를 가장하여 조직하였습니다. 단군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일제로부터 국권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 국외 독립 운동과 연계하여 대규모의 항일 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냈습니다.
조선국민회(1917) : 조선국민회는 평양의 숭싱할교 학생과 기독교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공화주의 단체입니다. 박용만과 연결되어 하와이 대조선 국민군단의 국내 지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간도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3.1 운동 당시 평안도 지방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서울에서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산직장려계(1914), 함경남도 단천에서 조직된 자립단(1915),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들이 조직한 송죽회(1913), 자진회(1918) 등 수많은 비밀 결사가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교육 문화 활동과 실력 양성에 치중하였습니다.
ㄹ. 대한광복회(1915) :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한 비밀단체로는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통합해 결성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 조직이 결성되었으나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각 도에는 지부장을 두었고 만주 지부도 결성하였습니다. 구성원은 의병 출신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박상진과 김좌진 등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도 많았습니다. 중앙에는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이석대를 선임하고, 이석대가 전사한 뒤 1917년부터는 새로 가입한 김좌진이 맡았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일반 부호로부터 접수한 의연금과 강제로 거둔 자금으로 무장을 준비하며, 남북 만주에 사관학교를 세워 사관을 양성하며, 무기를 구입하여 군인을 양성하고, 무력이 완비되기를 기다려 일본인에 대한 섬멸전을 전개한다는 투쟁방침을 정하였습니다. 군자금은 의연금을 모으는 방법 외에 친일 부호 처단이나 일제의 재산을 강제로 탈취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2)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ㄱ. 국외 이주 동포
만주와 연해주 : 만주는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되고, 개척한 농경지도 많았으며, 수렵이나 벌목으로도 생계가 가능하였습니다.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1910년 무렵,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한인이 20만 명을 넘었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할 목적으로 한인의 이주를 허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동포는 두만강을 건너가 러시아 정부가 준 토지를 경작하거나 황무지 등을 개간하였습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 곳곳으로 한인이 이주해왔습니다. 20세기 초, 연해주에는 8만 명이 넘는 한인이 모여 살았습니다.
일본 : 19세기 말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은 유학생들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합병 후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자, 생활 터전을 상실한 농민들이 일본의 산업 노동자로 취임함으로써 그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1917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호황기를 맞은 일본회사의 본격적인 조선인 노동자 모집으로 다시 대폭적인 증가를 보여 재일 조선인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계층은 노동자였습니다.
미주 : 미주 이주는 1902년 하와이 이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하와이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대한 제국 정부에 한국 농민의 이민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농민은 정부의 해외 취업 알선을 받아 하와이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이주가 시작된 지 3년 만에 하와이에는 7천여 명의 동포가 살게 되었습니다.
하와이로 이민 간 동포는 사탕수수 농장뿐만 아니라 철도 공사, 개간 사업 등 고된 일을 하면서 인종 차별까지 당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습니다.
ㄴ. 서간도 : 간도 지방에 설치된 독립 전쟁 기지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신민회 중심의 애국 계몽 운동 계열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건설한 서간도의 삼원보 기지였습니다.
경학사 : 병농일치제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민단적 성격을 띠는 자치 기관'이었습니다. 서간도로 건너간 신민회 회원들인 이동녕, 이상룡과 이회영, 이시영 등은 유화현 삼원보에서 경학사를 조직하였습니다. 경학사는 한인의 이주와 정착, 경제력 향상, 항일 민족 의식 고취 등의 사업을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또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낮에는 개간과 농업에 종사하며 틈틈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부민단(1912) : 경학사가 대흉년으로 해산되자 허혁, 이탁 등이 조직하였습니다. 부민단은 "부여 옛 땅에 부여 유민이 부흥 결사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주로 한인 자치와 한인 사회의 일체의 분쟁을 해결하고 중국인 또는 중국 관청과의 분쟁 사건 대리 처리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한족회(1919) : 3.1 운동 이후 삼원보에서 유하, 통화, 흥경, 환인, 집안 등지의 민족 지도자들이 통일된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종래의 자치 기관이었던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를 산하 기관으로 설치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주로 자치기구입니다. 이 밑에는 군사 활동을 주로 한 단체들입니다.
신흥강습소 : 1913년에 신흥학교로 발전되어 3.1 운동 때까지 1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3.1 운동 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어 1920년 8월에 폐교될 때까지 약 3천명의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서로군정서(1919) : 한족회는 이상룡을 독판에, 이청천을 사령관에 임명하여 조직을 갖추고 군정부의 기능을 갖는 서로군정서로 개편하였습니다.
대한독립단(1919) :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주도했던 박장호, 백삼규 등은 삼원보에서 자치 성격의 보약사 등을 확대 발전시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만주 지역은 물론 국내에 지단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ㄷ. 북만주
독립운동기지 : 민족 운동가들이 국외 독립 운동 기지를 최초로 개척하기 시작한 곳은 북간도였습니다.
서전서숙(1906) :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은 북간도의 연길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한인의 자제를 모아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명동학교(1908) :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김약연의 주도로 명동촌에 명동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밀산부 한흥동 : 밀산의 독립 운동 기지 개척은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이상설과 정순만, 이승희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여름부터 추진되었습니다.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한인 촌락인 한흥동을 건설하고 민족 교육 기관인 한민학교를 세워 한인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한편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해나갔습니다.
대한국민회(1919) : 북간도 지역에서는 한인 자치 단체인 간민회가 회명을 대한국민회로 고치고 본격적인 독립 운동 기관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대한국민회는 지방회와 지회를 설치해 한인의 자치와 독립 운동을 일원화하였습니다. 병력으로는 안무 지도하의 약 300명과 홍범도 휘하의 600여 명을 국민회 직할 독립군으로 편성하여 홍범도의 통솔하에 두었습니다.
대종교 계열
중광단(1911) : 대종교의 서일이 주도한 단체로 주로 청년들에게 애국 교육과 대종교 교리를 통한 항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습니다.
대한군정서(1919) :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 전쟁을 표방하고 만주 일대의 대종교 신도와 북상한 의병 등을 규합하여 정의단으로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정의단은 1919년 8월 군정회, 10월에 군정부로, 그리고 12울에는 상해 임시 정부의 명령에 복종키로 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중요 군단이 됩니다. 대한군정서는 김좌진과 같은 지휘관을 군사령관으로 맞이하고 사관 연성소까지 설치해 무관 양성에 주력하였습니다.
ㄹ. 연해주
독립 운동 기지 : 연해주의 한인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100여 개에 이르는 신한촌을 세웠습니다. 신한촌에는 1910년대 초에 국내외 민족 운동가와 항일 의병이 집결되었습니다. 1905년에 한국인 자치 기관인 한민회가 설치되었고, 해조신문(1908), 대동공보(1909)의 발행 등 언론 활동이 있었습니다.
1910년대
13도의군(1910) : 연해주는 국내에서의 의병 운동에 호응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의병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유인석, 이상설, 홍범도 등이 참여하여 연해주 의병의 통합체인 13도의군이 결성되었습니다.
성명회(1910) : 13도의군의 간부를 중심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 결사입니다. 성명회의 합방 반대 투쟁이 격화되자 일제는 러시아에 항의하였고, 러시아는 성명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 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권업회(1911) : 의병 운동 계열과 계몽 운동 계열이 힘을 모아 권업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권업회는 국권 회복을 목표로 연해주 한인 사회의 경제 이익의 증진과 민족 교육을 통한 계몽 활동과 함께 항일 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권업신문은 신채호를 비롯한 이상설 등이 교대로 주필을 맡았던 신문으로 1914년 정간 때까지 3년간 총 126호가 발간되었습니다. 한민학교는 권업회가 운영한 한인 교육 기관으로 러시아 한인 사회의 민족주의 교육 기관을 대표하는 학교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1914) : 이상설, 이동휘를 정,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광복군정부는 최초의 임시 정부로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계획하였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독립군 통수부로서 광범한 해외의 동포 사회를 기반으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한편 대한광복군정부의 계획이 실행되기 직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일제가 러시아와 중국을 압력하여 한국 독립 운동 세력을 탄압하였습니다.
한인사회당(1918) :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이동휘 등은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인사회당은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재편하였습니다.
대한국민의회(1919) :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은 러시아 한인 동포들은 시베리아 한인의 핵심 단체인 전로한족회 중앙총회(1917)를 결성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로 발전하였습니다.
1920 ~ 1930년대
자유시 참변 : 1029년대 초에 시베리아 내전이 종식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금지하고 무장 해제를 강요함으로써 연해주에서의 민족 운동은 약화되었습니다.
중일 전쟁 : 1937년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ㅁ. 기타 지역
상하이 :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편리한 상해도 해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단체로는 대종교의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1911), 이상설과 박은식이 조직한 신한 혁명당(1915), 여운형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1918) 등이 있습니다.
미주 : 1910년대 미주 이주 동포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애국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 운동 자금을 거두어 국내로 송금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재미교포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군인의 양성과 외교 활동에 역점을 두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단체로는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한 대한인 국민회,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조직한 대조선 국민군단,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등이 있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각종 의연금을 거두어 임시 정부에 송금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외교 기관인 구미 위원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군사 활동도 전개하여 한인군을 편성하였고, 많은 한인 청년들이 미국군에 자원 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3) 3.1 운동
ㄱ. 배경 : 러시아혁명(1917)은 전 세계 피압박 민족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신해혁명이래 전개되는 중국의 근대 민족 운동은 한국인의 근대 민족 의식을 자극하였습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제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구호는 식민지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열망을 기대감으로 바꾸어갔습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하여 유럽 지역에서 패전국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유럽 소수민족들은 종전과 함께 독립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과 미주 지역 대한인국민회의 외교 활동, 만주와 연해주 독립 운동 세력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 발표 등은 국내 독립 운동 세력을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국내에서는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한 고종 황제를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국내의 애국지사들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권 피탈 이래 세계 정세의 변화를 깊이 주목하면서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ㄴ. 과정
제1단계 : 민족 대표 33인이 운동을 기획, 준비하고 있었던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운동의 준비, 점화 단계입니다.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인사,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 한용운 등 불교계 인사들이 연합하여 대외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고, 대내적으로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도 이종일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어 전국에 미리 배포되었습니다. 서울의 민족 대표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옮겨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관원에 이 사실을 알려 주어 자진 투옥되었습니다.
제2단계 : 종로 탑골 공원에서 민족 대표를 기다리던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2시 30분 경 독자적으로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 행진에 들어갔습니다. 3월 초순 학생과 상인 및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만세 시위 운동이 서울,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전개된 운동의 초기 단계입니다. 상인과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와 동맹 파업, 철시, 전차 파괴 등의 방법으로 항쟁했습니다. 3월 8일 서울 용산의 조선 총독부 인쇄소 노동자들이 시회 운동을 벌였고, 9일에는 서울의 전차회사 차장과 운전수 120명이 동맹 파업을 단행하여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제3단계 : 3월 중순 ~ 4월 상순 사이 운동이 전국의 각 농촌으로 확산되고 주요 도시에서 운동이 재발하는 단계입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3.1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3월 10일 이후부터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서간도의 삼원보와 북간도의 용정이 앞서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ㄷ. 일제의 탄압
일제는 3월 1일 운동이 발발하자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정주, 원산 등지에서 곧 군대와 헌병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습니다. 첫날의 진압은 대체로 시위대 해산과 주동자 체포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시워 군중이 주동자의 체포에 폭력으로 항의하는 등 시위의 양상이 치열해지자 총독은 마침내 조선군사령관에게 명령하여 군중에 대한 발포, 살육 탄압을 지시했습니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마을을 불태웠고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은 그 한 예입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등으로 인해 운동은 4월 중순 이후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파는 다음해 3월까지 노동자들의 파업, 농민의 봉기, 학생들의 맹휴, 상인들의 철시 등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ㄹ. 의의와 영향
항일 독립 운동 : 소수의 친일 매국 세력을 제외한 각계각층의 계급적 이해 관계를 넘어서서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입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내 : 3.1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무단 통치의 질서를 기초에서부터 흔들어 놓음으로써 일제로부터 기만적이나마 '문화 정치'라는 양보를 얻어내 국내 민족 운동의 활동공간을 넓혀 놓았습니다. 3.1 운동을 거치면서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의 민족 의식과 계급 의식이 크게 각성되어 이후 그들이 점차 민족 해방 운동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어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습니다. 평북의 동암산을 근거로 무장 활동을 하던 보합단, 평북 천마산을 근거지로 한 천마산대, 그리고 황해도 구월산의 구월산대를 들 수 있습니다. 독립군 부대는 만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 기관 파괴, 일본 군경과의 교전, 친일파의 처단, 군자금 모금 등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천마산대는 일제 군경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만주에 설치된 광복군 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하였습니다. 일본 군경의 집요한 반격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통의부에 편입되었습니다.
국외 : 독립운동을 책임지고 이끌 통일적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3.1 운동은 이념적으로 복벽주의를 극복하고 민주 공화제 이념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의 무장 투쟁 노선이 본격화되었습니다. 3.1 운동에서의 평화적 시위 방법의 좌절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함으로써 이후 항일 무장 투쟁을 크게 고무했습니다.
한편 3.1 운동은 중국에서 일어난 5.4 운동(1919)과 인도에서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 그리고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 등지에서의 민족 해방 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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