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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항일 운동


 1. 191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
 1) 국내 비밀 결사 :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습니다.
 ㄱ. 특징 : 1910년대의 민족 운동을 주도한 것은 도시의 중산층과 교사, 학생, 유생 등 지식인층이 중심이었으며, 기독교, 불교, 대종교, 천도교 등 종교 단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은 대체로 무력 항쟁을 기본으로 하여 독립군을 직접 양성하거나 지원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한편 독립 후의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측과 주권재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측의 노선 차이가 있었습니다.

 ㄴ. 의병 계열
 * 독립의군부(1912) : 호남의 척사 유림인 최익현의 제자 임병찬이 고종의 밀칙을 받아 국내의 잔여 의병 세력과 유생을 규합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단체로서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일본의 총리 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끝까지 저항할 것임도 알렸습니다.

 민단 조합(1915) : 이강년 의병 부대에서 활동했던 이동하, 이은영 등이 민단 조합을 만들어 독립 전쟁을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발각되었습니다.

 ㄷ. 계몽 운동 계열
 조선국권회복단 : 경상도 지방에서는 대종교에 귀의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유생들이 시회를 가장하여 조직하였습니다. 단군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일제로부터 국권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 국외 독립 운동과 연계하여 대규모의 항일 운동을 전개할 것 등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냈습니다.

 조선국민회(1917) : 조선국민회는 평양의 숭싱할교 학생과 기독교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공화주의 단체입니다. 박용만과 연결되어 하와이 대조선 국민군단의 국내 지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간도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3.1 운동 당시 평안도 지방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서울에서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산직장려계(1914), 함경남도 단천에서 조직된 자립단(1915),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들이 조직한 송죽회(1913), 자진회(1918) 등 수많은 비밀 결사가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교육 문화 활동과 실력 양성에 치중하였습니다.

 ㄹ. 대한광복회(1915) :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한 비밀단체로는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통합해 결성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 조직이 결성되었으나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각 도에는 지부장을 두었고 만주 지부도 결성하였습니다. 구성원은 의병 출신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박상진과 김좌진 등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도 많았습니다. 중앙에는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이석대를 선임하고, 이석대가 전사한 뒤 1917년부터는 새로 가입한 김좌진이 맡았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일반 부호로부터 접수한 의연금과 강제로 거둔 자금으로 무장을 준비하며, 남북 만주에 사관학교를 세워 사관을 양성하며, 무기를 구입하여 군인을 양성하고, 무력이 완비되기를 기다려 일본인에 대한 섬멸전을 전개한다는 투쟁방침을 정하였습니다. 군자금은 의연금을 모으는 방법 외에 친일 부호 처단이나 일제의 재산을 강제로 탈취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2)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ㄱ. 국외 이주 동포
 만주와 연해주 : 만주는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되고, 개척한 농경지도 많았으며, 수렵이나 벌목으로도 생계가 가능하였습니다.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1910년 무렵,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한인이 20만 명을 넘었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할 목적으로 한인의 이주를 허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동포는 두만강을 건너가 러시아 정부가 준 토지를 경작하거나 황무지 등을 개간하였습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 곳곳으로 한인이 이주해왔습니다. 20세기 초, 연해주에는 8만 명이 넘는 한인이 모여 살았습니다.

 일본 : 19세기 말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은 유학생들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합병 후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자, 생활 터전을 상실한 농민들이 일본의 산업 노동자로 취임함으로써 그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1917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호황기를 맞은 일본회사의 본격적인 조선인 노동자 모집으로 다시 대폭적인 증가를 보여 재일 조선인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계층은 노동자였습니다.

 미주 : 미주 이주는 1902년 하와이 이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하와이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대한 제국 정부에 한국 농민의 이민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농민은 정부의 해외 취업 알선을 받아 하와이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이주가 시작된 지 3년 만에 하와이에는 7천여 명의 동포가 살게 되었습니다.
 하와이로 이민 간 동포는 사탕수수 농장뿐만 아니라 철도 공사, 개간 사업 등 고된 일을 하면서 인종 차별까지 당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습니다.

 ㄴ. 서간도 : 간도 지방에 설치된 독립 전쟁 기지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신민회 중심의 애국 계몽 운동 계열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건설한 서간도의 삼원보 기지였습니다.

 경학사 : 병농일치제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민단적 성격을 띠는 자치 기관'이었습니다. 서간도로 건너간 신민회 회원들인 이동녕, 이상룡과 이회영, 이시영 등은 유화현 삼원보에서 경학사를 조직하였습니다. 경학사는 한인의 이주와 정착, 경제력 향상, 항일 민족 의식 고취 등의 사업을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을 실시하였습니다. 또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낮에는 개간과 농업에 종사하며 틈틈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부민단(1912) : 경학사가 대흉년으로 해산되자 허혁, 이탁 등이 조직하였습니다. 부민단은 "부여 옛 땅에 부여 유민이 부흥 결사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주로 한인 자치와 한인 사회의 일체의 분쟁을 해결하고 중국인 또는 중국 관청과의 분쟁 사건 대리 처리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한족회(1919) : 3.1 운동 이후 삼원보에서 유하, 통화, 흥경, 환인, 집안 등지의 민족 지도자들이 통일된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종래의 자치 기관이었던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를 산하 기관으로 설치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주로 자치기구입니다. 이 밑에는 군사 활동을 주로 한 단체들입니다.

 신흥강습소 : 1913년에 신흥학교로 발전되어 3.1 운동 때까지 1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3.1 운동 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어 1920년 8월에 폐교될 때까지 약 3천명의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서로군정서(1919) : 한족회는 이상룡을 독판에, 이청천을 사령관에 임명하여 조직을 갖추고 군정부의 기능을 갖는 서로군정서로 개편하였습니다.

 대한독립단(1919) :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주도했던 박장호, 백삼규 등은 삼원보에서 자치 성격의 보약사 등을 확대 발전시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만주 지역은 물론 국내에 지단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ㄷ. 북만주
 독립운동기지 : 민족 운동가들이 국외 독립 운동 기지를 최초로 개척하기 시작한 곳은 북간도였습니다.
 서전서숙(1906) :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은 북간도의 연길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한인의 자제를 모아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명동학교(1908) :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김약연의 주도로 명동촌에 명동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밀산부 한흥동 : 밀산의 독립 운동 기지 개척은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이상설과 정순만, 이승희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여름부터 추진되었습니다.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한인 촌락인 한흥동을 건설하고 민족 교육 기관인 한민학교를 세워 한인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한편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해나갔습니다.

 대한국민회(1919) : 북간도 지역에서는 한인 자치 단체인 간민회가 회명을 대한국민회로 고치고 본격적인 독립 운동 기관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대한국민회는 지방회와 지회를 설치해 한인의 자치와 독립 운동을 일원화하였습니다. 병력으로는 안무 지도하의 약 300명과 홍범도 휘하의 600여 명을 국민회 직할 독립군으로 편성하여 홍범도의 통솔하에 두었습니다.

 대종교 계열
 중광단(1911) : 대종교의 서일이 주도한 단체로 주로 청년들에게 애국 교육과 대종교 교리를 통한 항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습니다.

 대한군정서(1919) :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 전쟁을 표방하고 만주 일대의 대종교 신도와 북상한 의병 등을 규합하여 정의단으로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정의단은 1919년 8월 군정회, 10월에 군정부로, 그리고 12울에는 상해 임시 정부의 명령에 복종키로 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중요 군단이 됩니다. 대한군정서는 김좌진과 같은 지휘관을 군사령관으로 맞이하고 사관 연성소까지 설치해 무관 양성에 주력하였습니다.

 ㄹ. 연해주
 독립 운동 기지 : 연해주의 한인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100여 개에 이르는 신한촌을 세웠습니다. 신한촌에는 1910년대 초에 국내외 민족 운동가와 항일 의병이 집결되었습니다. 1905년에 한국인 자치 기관인 한민회가 설치되었고, 해조신문(1908), 대동공보(1909)의 발행 등 언론 활동이 있었습니다.

 1910년대
 13도의군(1910) : 연해주는 국내에서의 의병 운동에 호응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의병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유인석, 이상설, 홍범도 등이 참여하여 연해주 의병의 통합체인 13도의군이 결성되었습니다.

 성명회(1910) : 13도의군의 간부를 중심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 결사입니다. 성명회의 합방 반대 투쟁이 격화되자 일제는 러시아에 항의하였고, 러시아는 성명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 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권업회(1911) : 의병 운동 계열과 계몽 운동 계열이 힘을 모아 권업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권업회는 국권 회복을 목표로 연해주 한인 사회의 경제 이익의 증진과 민족 교육을 통한 계몽 활동과 함께 항일 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권업신문은 신채호를 비롯한 이상설 등이 교대로 주필을 맡았던 신문으로 1914년 정간 때까지 3년간 총 126호가 발간되었습니다. 한민학교는 권업회가 운영한 한인 교육 기관으로 러시아 한인 사회의 민족주의 교육 기관을 대표하는 학교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1914) : 이상설, 이동휘를 정,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광복군정부는 최초의 임시 정부로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계획하였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독립군 통수부로서 광범한 해외의 동포 사회를 기반으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한편 대한광복군정부의 계획이 실행되기 직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일제가 러시아와 중국을 압력하여 한국 독립 운동 세력을 탄압하였습니다.

 한인사회당(1918) :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이동휘 등은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인사회당은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재편하였습니다.

 대한국민의회(1919) :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은 러시아 한인 동포들은 시베리아 한인의 핵심 단체인 전로한족회 중앙총회(1917)를 결성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로 발전하였습니다.

 1920 ~ 1930년대
 자유시 참변 : 1029년대 초에 시베리아 내전이 종식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금지하고 무장 해제를 강요함으로써 연해주에서의 민족 운동은 약화되었습니다.

 중일 전쟁 : 1937년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ㅁ. 기타 지역
 상하이 :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편리한 상해도 해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단체로는 대종교의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1911), 이상설과 박은식이 조직한 신한 혁명당(1915), 여운형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1918) 등이 있습니다.

 미주 : 1910년대 미주 이주 동포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애국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 운동 자금을 거두어 국내로 송금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재미교포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군인의 양성과 외교 활동에 역점을 두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단체로는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한 대한인 국민회,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조직한 대조선 국민군단,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등이 있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각종 의연금을 거두어 임시 정부에 송금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외교 기관인 구미 위원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군사 활동도 전개하여 한인군을 편성하였고, 많은 한인 청년들이 미국군에 자원 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3) 3.1 운동
 ㄱ. 배경 : 러시아혁명(1917)은 전 세계 피압박 민족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신해혁명이래 전개되는 중국의 근대 민족 운동은 한국인의 근대 민족 의식을 자극하였습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제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구호는 식민지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열망을 기대감으로 바꾸어갔습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하여 유럽 지역에서 패전국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유럽 소수민족들은 종전과 함께 독립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과 미주 지역 대한인국민회의 외교 활동, 만주와 연해주 독립 운동 세력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 발표 등은 국내 독립 운동 세력을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국내에서는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한 고종 황제를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국내의 애국지사들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권 피탈 이래 세계 정세의 변화를 깊이 주목하면서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ㄴ. 과정
 제1단계 : 민족 대표 33인이 운동을 기획, 준비하고 있었던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운동의 준비, 점화 단계입니다.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인사,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 한용운 등 불교계 인사들이 연합하여 대외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청원하고, 대내적으로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도 이종일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어 전국에 미리 배포되었습니다. 서울의 민족 대표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옮겨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관원에 이 사실을 알려 주어 자진 투옥되었습니다.

 제2단계 : 종로 탑골 공원에서 민족 대표를 기다리던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2시 30분 경 독자적으로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 행진에 들어갔습니다. 3월 초순 학생과 상인 및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만세 시위 운동이 서울,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전개된 운동의 초기 단계입니다. 상인과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와 동맹 파업, 철시, 전차 파괴 등의 방법으로 항쟁했습니다. 3월 8일 서울 용산의 조선 총독부 인쇄소 노동자들이 시회 운동을 벌였고, 9일에는 서울의 전차회사 차장과 운전수 120명이 동맹 파업을 단행하여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제3단계 : 3월 중순 ~ 4월 상순 사이 운동이 전국의 각 농촌으로 확산되고 주요 도시에서 운동이 재발하는 단계입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3.1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3월 10일 이후부터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서간도의 삼원보와 북간도의 용정이 앞서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ㄷ. 일제의 탄압
 일제는 3월 1일 운동이 발발하자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정주, 원산 등지에서 곧 군대와 헌병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습니다. 첫날의 진압은 대체로 시위대 해산과 주동자 체포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시워 군중이 주동자의 체포에 폭력으로 항의하는 등 시위의 양상이 치열해지자 총독은 마침내 조선군사령관에게 명령하여 군중에 대한 발포, 살육 탄압을 지시했습니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마을을 불태웠고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은 그 한 예입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등으로 인해 운동은 4월 중순 이후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파는 다음해 3월까지 노동자들의 파업, 농민의 봉기, 학생들의 맹휴, 상인들의 철시 등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ㄹ. 의의와 영향
 항일 독립 운동 : 소수의 친일 매국 세력을 제외한 각계각층의 계급적 이해 관계를 넘어서서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입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내 : 3.1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무단 통치의 질서를 기초에서부터 흔들어 놓음으로써 일제로부터 기만적이나마 '문화 정치'라는 양보를 얻어내 국내 민족 운동의 활동공간을 넓혀 놓았습니다. 3.1 운동을 거치면서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의 민족 의식과 계급 의식이 크게 각성되어 이후 그들이 점차 민족 해방 운동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어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습니다. 평북의 동암산을 근거로 무장 활동을 하던 보합단, 평북 천마산을 근거지로 한 천마산대, 그리고 황해도 구월산의 구월산대를 들 수 있습니다. 독립군 부대는 만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 기관 파괴, 일본 군경과의 교전, 친일파의 처단, 군자금 모금 등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천마산대는 일제 군경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만주에 설치된 광복군 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하였습니다. 일본 군경의 집요한 반격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통의부에 편입되었습니다.

 국외 : 독립운동을 책임지고 이끌 통일적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3.1 운동은 이념적으로 복벽주의를 극복하고 민주 공화제 이념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의 무장 투쟁 노선이 본격화되었습니다. 3.1 운동에서의 평화적 시위 방법의 좌절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함으로써 이후 항일 무장 투쟁을 크게 고무했습니다.
 한편 3.1 운동은 중국에서 일어난 5.4 운동(1919)과 인도에서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 그리고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 등지에서의 민족 해방 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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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


 1. 1910년대 식민 통치
 1) 무단 통치
 ㄱ. 조선총독부 : 조선 총독을 보좌하는 행정 사무를 총지휘하는 정무총감을 두고 총무, 내무, 탁지, 농상공의 행정 기관과 사법 기구로서 재판소, 치안 기구로서 경무 총감부는 헌병 경찰을 총괄하고, 자문 기구로서 중추원과 취조국을 두었습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같은 격인 조선 총독은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군권까지 장악한 통치의 최고 실력자였습니다. 한국에 부임했던 9대에 걸친 8명의 총독 가운데 사이토 총독만이 해군대장 출신이었을 뿐 나머지 모두가 육군대장 출신이었습니다. 조선 총독은 임기를 마친 후 내각총리대신으로 부임하는 예가 많았습니다.
 총독을 보좌하는 최고 직책으로는 정무총감을 두어 정무를 총감하고 총독부 각 부, 국의 사무를 감독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정무총감은 대체로 조선 총독이 부임하면서 함께 한국에 오고, 또 그 임기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경무총감부를 총독의 직속 기관으로 삼고 헌병 사령관을 경무총감으로, 헌병 대장을 각 도 경찰부장으로, 헌병 장교를 경시로, 헌병 하사를 경부로 임명하고, 그 말단에는 조선인을 헌병 보조원 내지 순사보로 채용했습니다. 조선 총독부 아래 형식적 자문 기관인 중추원을 두고, 황족과 이완용, 송병준, 김윤식 등 친일파와 대한제국 시기의 친일 관료들을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ㄴ. 헌병경찰제 : 치안 확보를 구실로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여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 지휘와 일반 경찰 업무를 관장하도록 했습니다. 검사 사무 대리, 범죄의 즉결처분, 민사 소송 조종, 삼림 감시, 징세 사무 협조, 검열 사업, 보건 업무 등 일반 행정 사무까지 처리했습니다. 민족 차별적 악법인 '범죄즉결례', '조선태형령'(1912), '경찰범 처벌규칙'(1912)에 따라 멋대로 조선인에게 벌금, 태형, 구류형 등을 부과할 수 있는 재판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일제는 갑오개혁 때 폐지했던 태형을 부활시켜 조선인에게만 적용했습니다.

 ㄷ. 민족 억압 : 1910년 '집회단속에 관한 건'을 새로 제정하였고 '신문지법', '출판법'을 확대 적용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모든 근대적 기본권을 철저히 부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일진회와 기타 친일 성향의 단체까지 모두 해산했으며 총독부와 종교계에서 발간하는 잡지 외에 모든 한글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였습니다. 또 한국인을 위협할 목적으로 헌병 경찰은 물론 일반 관리와 학교 교원까지 제복과 제모를 착용하고 착검하였습니다.

 2) 식민지 수탈 정책 : 경제 구조를 일제의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고,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수탈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토지 조사 사업, 임야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회사령(1910), 삼림령(1911), 어업령(1911), 광업령(1915)을 공포하였습니다.
 ㄱ. 토지 조사 사업 : 1910년 토지 조사국 창설 후 1912년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실질적인 목표는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조선 총독부의 지세 수입을 증대시키기에 적합한 토지 제도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지세 부담의 공평, 지적의 확정과 소유권의 보호, 토지 개량과 이용의 자유 보장, 생산력의 증진 등이었습니다.
 토지조사령(1912)은 토지의 소유권, 토지 가격, 지형 및 용도를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토지 소유자로 하여금 토지 조사국에 소유지를 신고하게 함으로써 그 소유권을 인정받게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농민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관습적인 경작권은 부정되었습니다. 총독부는 당사자가 소유권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소유권을 인정하고, 대한 제국 정부 소유지와 황실 소유지, 미신고 토지 및 소유 관계가 불분명한 토지 등은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은 1918년 11월에 완료되었는데, 총독부는 약 13만 5천정보의 역둔토와 약 4만 6천정보의 민유지를 수탈했습니다. 1930년대까지 총독부가 소유한 토지는 전 국토의 40%에 이르렀습니다.
 총독부는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회사나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겼습니다. 일본인의 농업 이민이 10배로 급증하고, 그들의 소유 농지는 4배로 증가하여 큰 지주로 성장해 갔습니다. 1918년 당시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는 식민지적 지주제가 성립되었습니다. 토지 조사 사업은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을 몰락시킨 반면, 소작농과 농업 노동자 및 이농민을 증가시켰습니다. 기한부 계약에 따라 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이 늘어났습니다. 생활 기반을 상실한 농민은 일본인의 고리대에 시달리게 되었고, 생계 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한편 총독부의 지세 수입은 1919년 현재 1911년의 두 배로 늘고 과세지는 10년 사이 52% 증가하였습니다.

 ㄴ. 민족 자본 억제 : 일단 인삼, 소금, 아편 등은 총독부에서 판매하였습니다.
 * 회사령(1910) : 회사령은 회사를 설립하거나 해산할 때에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조선 총독이 내리는 명령 및 허가 조건을 위반하거나 공공의 질서 혹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조선 총독은 사업의 정지, 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조선에 있는 일본 영세 자본을 보호하고 한국인의 기업 활동과 자본 축적을 억제함으로써 산업 구조를 일제의 의도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등의 철도가 신설되고 간선도로가 보수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시설은 한국인의 조세 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또 조선은행법(1911), 은행령(1912), 조선식산은행령(1918) 등으로도 수탈당했습니다.

 3) 식민지 교육 정책 : 일제는 국권 강탈 후 조선 교육령을 만들어 식민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하면서, 낮은 수준의 실업 교육을 통해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려 하였습니다.
 ㄱ. 1차 조선교육령(1911) : 조선에서의 교육 목적을 일본 군국주의의 교육 정신을 담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바탕을 둔 '충량한 국민'을 만드는 대 두고, 조선의 교육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전문 교육으로 한정했습니다. 합방 후 일본은 조선에서도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우리말을 조선어라 이름을 바꾸는 한편, 각급 학교에서도 조선어보다 일본어 교육을 강화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보급하기 위한 보통교육과 농, 상, 공업 분야의 하급 직업인을 만들기 위한 실업교육, 그리고 약간의 전문적 기예를 가르치는 전문교육에 그치고 대학교육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명칭부터 달라서 한국인 학교는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일본인 학교는 소학교라 중학교라 하였습니다. 초등 교육 기관의 경우 일본이 소학교 6년제였던 데 비해, 조선은 4년 내지 5년제의 보통학교로 했습니다. 중등 교육 기관 역시 일본이 5년제 중학교였던 데 비해, 조선은 4년제의 고등보통학교로 했으며 여자는 3년제로 했습니다.
 * 사립 학교 규칙(1911.10) : 사립 학교에 대한 인가 조건을 훨씬 강화함으로써 사립 학교 수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교과서도 통제하여 합방 전에 사용하던 교과서의 대부분을 금지시켰습니다.
 * 서당 규칙(1918) : 사립 학교에 대한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자 오히려 서당 교육이 신장되어 서당 수가 급증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서당에서는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항일 교육이 가능해 민족 교육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서당 규칙을 발동하여 서당 설치 억제와 교과과정에 대한 간섭 강화를 통해 민족 교육을 봉쇄하였습니다.

 
 2. 1920년대 문화 통치
 1) 문화 통치 :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의 창달과 민력의 충실'을 시정 방침으로 하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습니다. 사이토 총독은 한국인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대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한국인 관리의 임용을 늘리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허용하며 교육, 산업, 행정을 개선하고 지방 자치제를 준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총독에 문관도 임명할 수 있도록 개정하였습니다. 다만 그런 예는 없습니다...
 관리나 교원의 제복 착용 및 칼 차기와 헌병 경찰 제도가 폐지되고 보통 경찰 제도가 채택되었습니다. 다만 이것도 역시 보통 경찰 제도였지만 실상은 경찰 수와 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전국의 경찰관서와 경찰관을 3배 이상 늘리고, 부와 군마다 한 개의 경찰서, 면마다 한 개의 주재소를 설치하였습니다. 또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였습니다. 특고형사를 신설하였고, 사복형사나 밀정 등에 의한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도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무관하다든가 혹은 도움이 될 때만 허용된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1920), 조선일보(1920), 시대일보(1924)와 같은 우리말 신문의 창간이 허용되었으나, 심한 검열을 받아 삭제, 압수, 벌금, 정간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결사의 허용도 역시나 친일 단체를 조직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또, 일제는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족 운동가들도 회유하는 한편,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철저히 탄압하였습니다.

 2) 경제 수탈 : 1910년대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 경제는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식량과 공업 원료를 한국에서 값싸게 공급받고, 일본 기업의 한국 침투를 돕기 위한 조치를 잇따라 시행하였습니다.
 ㄱ. 회사령 폐지(1920. 4) : 일본의 자본 침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회사령을 폐지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경기를 통해 일본의 독점 자본은 급성장했고,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 투자할 만한 조건들이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미쯔이, 미쯔비시, 노구찌 등 일본 재벌 자본의 침입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공업 분야에서는 일본의 중소 자본에 의한 경공업인 제사, 면방직, 식료품 분야가 발달하였는데 특히 식료품 가공업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식료품 공업은 대부분 도정업이었습니다. 중화학 공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조선수력전기회사에 의한 부전강 수력개발(1926)과 함경도 흥남에 건설된 질소비료회사(1927)가 규모가 큰 것입니다. 면방직이나 식료품 공업, 광업 분야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일제는 일본 자본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의 탄압을 일삼았는데, 한국인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민족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당했습니다.

 ㄴ. 산미증식계획(1920 ~ 1934) : 일제가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 정책입니다. 일본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미가 정책, 식량 대책이었습니다. 산미증식계획의 기본 목표는 수리시설 확충을 통한 토지 개량과 벼 품종 개량 및 비료 증가에 의한 농사 개량으로 미곡 증식과 증식미의 일본 반출이었습니다. 제1차 계획은 1920~1925년, 제2차 계획은 1926년부터 시행되었는데, 농업 공황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여 조선 쌀의 수출이 일본의 농촌 경제를 악화시키자 일본 내부의 반발에 부딪혀 1934년에 중단되었습니다.
 늘어난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1936년 현재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30%가 증가한 데 불과하였으나,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약 8배로 증가하였습니다. 1932~1936년의 평균 쌀 생산량은 1700만 석인데, 일본으로 가져간 것은 그 절반이 넘는 876만 석이었습니다.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20년의 약 7두에서 4두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1년에 1인당 1석 2두를 소비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 등으로 메꾸어 갔습니다.
 한국의 농업은 점차 벼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농업 구조와 유통 구조까지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경제 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었습니다. 조선인 농민들은 수리 조합비나 비료 대금을 비롯한 각종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작농이나 자, 소작농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은 1920년대 이후 소작 쟁의가 격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ㄷ. 관세 폐지(1923) : 조선을 일본의 상품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수출은 계속 증가했습니다. 1917년에 7269만 엔이던 것이 1925년에는 2억 3462만 3천 엔으로, 1929년에는 3억 1532만 5천 엔으로 증가하여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수출 대상지의 위치를 굳혀갔습니다.

 3) 식민지 문화 정책
 ㄱ. 제2차 조선교육령(1922) : 3.1 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교육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신교육령을 발표하고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교육시킨다고 표방하였습니다.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일본인 학교와 같이 6년으로 연장할 수 있게 하고, 고등보통학교는 5년으로, 여자고등학교는 4년으로 연장했습니다. 사범학교를 설치하게 하고, 또 대학에 대한 규정을 두어 조선에도 처음으로 대학이 설치될 수 있게 했습니다. 경성제국대학(1924)을 설치하고 전체 학생의 약 1/3 정도를 한국인에 할당하였습니다. 또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고등보통학교에서의 외국어 교육을 확대하고 실업 교육에 대한 치중을 다소 완화하였습니다.
 표면상 일본인 교육과 대등하게 보이도록 했지만, 역시나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한국인 학령 아동의 약 18%만이 취학하는 데 그쳤습니다. 3면 1교 주의를 내세워 교육 시설을 확장하는 듯이 선전했으나 이는 민족주의 교육의 주요 온상이 되고 있었던 사립 학교와 서당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실업교육을 강조하여 중학교의 증가를 억제하고 농업학교, 공업학교, 상업학교 등 중등실업학교를 증가시켰습니다. 이것은 한국인 학생들의 중학교 교육을 가능한 한 막고 나아가 전문인의 육성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민만을 위한 대학은 아니었고, 오히려 일본인 학생이 더 많았습니다. 또 한국 역사, 한국 지리 시간을 대폭 줄이고 반면에 일본 말, 일본 역사, 일본 지리 시간을 대폭 늘렸습니다.

 ㄴ. 한국사 왜곡 : 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제는 타율성, 정체성, 당파성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습니다. 1922년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찬위원회(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를 설치하고 일본인 어용학자와 일부 한국인 역사가를 참여시켜 35권의 방대한 자료집인 조선사를 1937년에 완성하였습니다.


 3. 병참 기지화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
 1) 만주사변과 조선공업화 :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으로 영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블록 경제권을 형성하여 공황에 대처해 나갔습니다. 선진 국가의 공황은 후진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 파급되어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데, 일본은 이를 돌파하는 방안으로 아시아대륙을 침략하여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고 이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하였습니다. 그 과정으로 1931년 만주를 완전 점령하고, 장춘에 일본 꼭두각시 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이를 만주사변이라고 합니다.

 ㄱ. 조선공업화 정책 : 1930년대 이후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총독부가 일본은 발전된 공업 지역으로 유지하면서, 만주는 농업과 원료 생산 지대로 만들고, 한국은 경공업 중심의 중간 지대로 만들기 위해 조선공업화 정책을 폈기 때문입니다. 또 총독부는 남면북양 정책을 강제로 실시하여 일본인 방직 자본가를 지원했습니다. 일본은 섬유 공업의 원료로서 목화와 양모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는데, 조선에서 목화와 양모를 증산함으로써 섬유 공업의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ㄴ. 농촌진흥운동 :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이 확산되어 식민 지배 체제에 위협을 주자 일본제국주의는 지주제를 일정하게 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자력갱생을 주장하며 농민에게 자작농지 구입 자금을 대부하는 '자작농지 창설유지사업'(1932), 사법 기관의 조정으로 소작 쟁의를 방지하려는 '조선소작조정령'(1932), 지주의 고율 소작료를 어느 정도 통제하는 '조선농지령'(1934)등 농업 진흥 대책을 잇달아 공포했습니다.

 2) 병참기지화 정책 : 침략 전쟁을 도발한 이후 일제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통치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고 인력을 공급하는 병참기지로서의 역할과 이를 위한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ㄱ. 침략 전쟁 확대
 중일전쟁(1937) : 중국과의 전쟁을 시작하고, 약 30만 명의 남경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태평양전쟁(1941) : 미국의 하와이를 공격해 이른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ㄴ. 공업
 중화학 공업 : 조선공업화 정책은 대륙 침략을 위한 전쟁 물자 생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추진되었습니다. 일제는 전력 자원을 개발하고, 토지와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하였으며, 광산 자원을 약탈하였습니다. 또 일본 대자본이 활발하게 침투하면서,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금속,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바르게 성장하였습니다. 함경도 흥남을 중심으로 한 북부 공업 지대, 진남포, 신의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공업 지대, 서울,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 공업지대입니다.

 ㄷ. 국가 총동원 체제 :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식민지 정책은 한국의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국가 총동원 체제를 만들어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군수 물자의 보급과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전면적인 국가 통제와 동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였고, 1938년 5월 국가 총동원법을 조선에 적용하였습니다.
 *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1938) : 각급 직장과 읍, 면, 동, 리의 말단 지방 행정 기구에 이르기까지 하부 조직을 두어 조선 민중의 생활을 통제했습니다. 지방 연맹 아래 10호를 기준으로 애국반을 만들고, 정기적인 반상회를 열어 총독부 시책을 따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들은 일장기 게양, 신사 참배, 일본 천황의 궁성에 대한 배례, 일본어 상용, 방공 방첩, 애국저금 등을 강요했고, 일본정신발양주간, 근로보국주간, 저국보국주간 등을 계속 만들고 실천시킴으로써 침략 전쟁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ㄹ. 물자 수탈
 미곡 :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을 개시하면서 식량 수요가 급격히 증대하자 미곡 수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한해가 극심했던 1939년부터 다시 미곡 증산 계획을 실시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40년 장기적인 조선증미계획, 조선증미갱신계획 등을 실시하여 식량 증산을 꾀했습니다. 총독부는 각 농가로부터 자가 소비분을 제외한 쌀과 보리를 공출하여 이를 식량 배급 조직을 통해 군수와 민수에 배분하였습니다. 각 가정에는 쌀을 살 수 있는 배급표를 지급하였습니다.
 
 자원 수탈 : 물자 보급이 심회되자 일제는 군수 산업 이외의 기업 활동을 통제하기도 하였으며, 광물 자원의 약탈은 물론 학교의 철문이나 집안의 숟가락, 놋그릇까지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세금을 늘리고 저축을 강요하여 마련된 자금은 군수 기업에 집중적으로 지원되었습니다.

 인력 수탈 : 모집, 징용, 보국대, 근로동원, 정신대 등을 통한 노동력의 강제 수탈이 있었습니다. 또 1940년대에 전시 체제가 되면서 남녀의 복장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남자는 한복이나 양복 대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전투모에 각반을 찼습니다. 여자는 치마 대신 일본 농촌 여성의 작업복인 몸빼라는 바지를 입어야 했습니다.
 일제는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려고 국민 징용령(1939)을 실시했습니다. 1939~1945년 사이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113~146만 명으로, 이들은 주로 탄광과 금속 광산, 토건 공사, 군수 동장 등에 투입되었습니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군대 기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학살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 수십만 명을 강제로 군수공장과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이들은 일본과 조선 내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 인원을 중국과 동남아 지역의 전쟁터로 보내 군인 상대의 위안부가 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일제는 모자라는 전쟁 인력을 채우려고 1938년 '육군 특별 지원병제'를 실시했고, 1943년에는 '학도 지원병제'를 실시하여 전문학교 이상 학생들을 전쟁터로 강제 연행했습니다. 1944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불과 1년여 동안 20여만 명의 조선 청년을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고 갔습니다.

 3) 민족 말살 정책
 ㄱ. 황국 신민화 정책 :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1931년 우가키 총독은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조선 2000만 민심의 향배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이른바 '내선융화'를 강조했습니다. 이 정책은 1936년 8월 총독으로 부임한 전직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형태도 마음도 피도 살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우선 서울의 남산 신궁을 비롯하여 각 학교와 면마다 신사를 세우고, 각 가정에서도 일본 시조신의 신주를 걸어 놓고 예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또 일제는 1937년부터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제폐하께 충성을 다합니다." 등의 내용이 담긴 '황국 신민 서사'라는 충성 맹세문을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서 천황의 궁성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 3차 조선 교육령(1938) : 3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내선일체'를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초등학교의 시설을 1면 1교를 목표로 하여 확장해갔습니다. 학교 명칭을 일본인 학교와 같게 하여 보통학교를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바꾸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다니는 중학교를 각 지방에 세웠습니다. 조선어는 선택 과목인 수의 과목으로 변경했고, 일본어, 일본 역사, 일본 지리, 수신, 공민 등 조선인에게 일본 문화와 정신을 강요하는 교과목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학교 교육과 관공서에서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게 하고, 일본어만을 사용하게 하였습니다.(1938) 총독부는 신문에 보도할 기사의 통제를 계속하다가 194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마저 폐간시켰습니다. 또 1939년부터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 개명을 단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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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대의 문화


 1. 근대 문물
 1) 서양 과학 기술
 ㄱ. 흥선대원군 집권기 :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알게 된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던 흥선 대원군도 서양의 무기 제조술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ㄴ. 1880년대 : 개항 이후 개화파 인사들은 부국강병을 통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정부도 동도서기론을 내세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였습니다. 근대 제도와 기술을 도입하고자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일본과 청나라에 파견하였으며, 박문국에서는 한성 순보를 간행하였습니다.
 박문국(1883) : 인쇄, 출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입니다. 한성 순보를 간행했습니다.
 기기창(1883) : 중국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서울 삼청동에 기기창을 설치하여 무기를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전환국(1883) : 근대 화폐를 주조할 상설 조폐 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환국을 설치하였습니다.
 우정국(1884) :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시찰한 홍영식은 귀국한 뒤 고종에게 근대적 우정 제도에 대한 보고를 하였고 이에 고종은 우정총국을 설립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정부 주관의 서양 기술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기 제조 기술이었습니다.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할 때 군물사, 선함사 등 무기의 도입과 제작을 전담하는 기관을 두었고 기계사를 두어 각종 기계의 제작과 구입을 담당케 하였습니다.

 ㄷ. 1890년대 이후 : 기예 학교, 의학교, 광무 학교, 공업 전습소 등 각종 기술 학교들이 설립되었습니다.

 2) 근대 시설
 ㄱ. 전기, 통신 : 1884년 2월 부산에 우리 나라 최초로 전신이 가설되었습니다. 이 전신은 일본의 장기와 부산 사이의 해저전선이 개통됨에 따라 일본이 부산에 전신국을 세울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요구했기 때문에 가설된 것입니다. 1885년 청나라에서 추진한 전신가설은 인천을 거점으로 한성, 평양을 경유하여 의주에 이르는 것으로 서로전선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전신의 가설로 중국은 물론 세계 각국과 통신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은 청의 운영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독일로부터 차관을 얻어 서울-부산 간(1888), 서울-원산 간(1891)의 전선을 독자적인 기술로 완성하였습니다. 이로써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장과 의주를 잇는 근대적인 통신망이 완성되었습니다.

 경복궁 전등 설치는 1884년 추진되다가 갑신정변에 의해 중단된바 있습니다. 1887년에는 미국의 에디슨 전등 회사를 통해 전구 등을 수입하여 우리나라에 최초로 경복궁에 전등불이 켜지면서 전등이 보급되었습니다. 1894년 창덕궁에까지 전등을 설치하였습니다. 1900년 전등이 민간에 켜졌는데, 종로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에 가로등 세 개를 점등했던 것입니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전화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습니다. 공중용 전화는 1902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설치되었고 이후 전화는 중앙 정부 또는 중앙과 지방 관청 사이에 설치되어 공적 업무에 주로 이용되었습니다.

 ㄴ. 의료
 광혜원(1885) : 고종은 미국인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왕립 광혜원(제중원으로 개칭)을 재동에 설립하여 알렌에게 책임을 맡겼습니다. 제중원은 환자의 진료 활동만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 설립 초기부터 병원 안에 의교 교실을 개설하였습니다. 1886년 3월에 정부의 협조를 얻어 제중원의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우두 : 정부에서는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서 우두국을 주요 지방에 설치하였습니다. 지석영은 천연두 예방법을 정리하여 우두신방을 출판하였습니다.

 ㄷ. 교통
 전차 : 미국인 콜브란은 서울 안에서 전차, 전등, 전화 등의 사업을 하는 한성전기회사(1904년 한미전기회사로 개칭)를 설립했습니다. 1898년 서대문, 청량리 홍릉 강 궤도공사를 하여 1899년 5월 전차 여덟대와 황실용 전차 한 대로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철도 : 철도는 경인선이 개통된 후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 경의선이 부설되었습니다. 경인선은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9일 기공되었고, 1899년 9월 18일 일본의 경인철도 합자회사가 완공시켜 개통되었습니다. 경부선은 1898년 일본이 부설권을 받아냈으나 조선 민중의 반대와 일본의 자본 축적 부족, 기술 수준의 미달 때문에 착공하지 못하다가 1904년 완공했습니다. 경의선은 1896년 프랑스에게 넘어갔으나, 박기종 등이 대한철도회사를 설립하여 그 부설권을 신청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5년 이내에 착공하고 5년 이내에 완공할 것을 조건으로 허가했습니다.(1899) 러일 전쟁을 도발한 후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 의정서에 의해 군용 철도란 명목으로 부설권을 강탈했습니다. 경원선은 서울 용산과 함경남도 원산 사이에 부설된 철도로 1904년 착공되기 시작하여 1914년 9월 6일 개통되었습니다.

 ㄹ. 서양식 건축물
 독립문 : 건축 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의하여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해서 1896년부터 1897년 완공되었습니다.

 명동 성당 : 우리나라 천주교를 대표하며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 양식의 건물로, 1892년에 착공하여 1898년에 준공하였습니다.

 덕수궁 석조전 : 1900년에서 1910년에 걸쳐 석조전이 지어졌습니다. 당시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순수 석조로 된 유일한 건물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3) 서양 문물 도입의 문제점
 ㄱ. 외국인에 의존 : 서양 문물의 도입은 국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이점도 있었지만, 기술과 관리를 외국인에게 의존했으므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ㄴ. 제국주의 침략 : 개화파가 부국강병을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인 사회진화론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실력 양성론의 근거가 되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2. 교육과 학문, 언론
 1) 교육 기관
 ㄱ. 1880년대
 a. 관립 학교
 동문학(1884) : 정부는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고, 어학생 40여명을 뽑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영어와 일어 및 서양의 필산 등을 가르쳤습니다.

 육영공원(1886) : 민영익의 건의에 따라 육영공원을 세워 미국에서 초청한 미국인 헐버트, 길모어 등 교수가 수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문무 현직 관료 중에서 선발된 학생을 수용하는 좌원과 양반 자제에서 선발된 학생을 수용하는 우원의 두 반으로 되어 있었고 학생 정원은 35명이었습니다.

 b. 사립 학교
 원산학사(1883) : 개화파 관료인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과 민간인들이 합작하여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립 교육 기관입니다. 문예반과 무예반을 두고 경서와 병서를 비롯하여 산수, 물리, 기계, 농업, 법률, 만국공법, 지리, 일본어 등 각종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였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사립 학교를 세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으며, 20세기 초 애국 계몽 운동가들도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워 근대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1885년 기독교 선교를 위해 입국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학생들을 모아 영어를 비롯한 서양의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고종은 1886년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고아원 형식의 학교(뒤의 경신학교)를, 스크랜턴 부인이 이화학당을 창설하여 서양식 학교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ㄴ. 1890년대
 a. 갑오개혁 : 교육 입국 조서의 정신에 따라 근대 교육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학교와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근대적 교육 제도에 따라 국민 소학 독본, 초등 본국 역사 등 새로운 교과서도 선보였습니다.

 b. 을미개혁 이후 : 소학교령에 의해 수업 연한 6년의 관공립 소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등 교육 기관으로 최초로 한성 중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ㄷ. 애국 계몽 운동기
 a. 사립 학교 : 을사 조약 체결 이후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전개된 신교육 운동의 결과 전국 각처의 사립 학교가 5000개에 이르렀다는 일제의 기록도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관서 지방에 전체 사립 학교의 2/3 이상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서울에는 황실과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 세운 학교가 많은 것이 주목됩니다. 이는 대한 제국이 황실 재정의 일부를 근대 교육에 투자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학교들로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양정의숙의 설립을 비롯하여 휘문의숙,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 등이 설립되었습니다.

 b. 일본의 탄압
 보통 학교령(1906) : 관공립 6년제 소학교를 4년제 보통학교로 개편하였습니다.
 사립 학교령(1908) : 시설과 규모를 엄격히 규정함으로써 많은 사립 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켰습니다. 사립 학교를 설립할 때 반드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고, 교과서도 학부편찬서나 학부의 검정을 받은 서적을 쓰게 하였습니다. 사립 학교 교사에 대한 자격을 명시하였으며, 학부대신에 의하여 학교 폐쇄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2) 국학의 연구
 ㄱ. 배경 및 의의 : 조선 후기 실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국학 연구는 대한 제국 말기인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국어와 국사를 비롯하여 민족 의식을 높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 문화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던 만큼 학문적 깊이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국학운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애국 계몽 운동의 노선에 따라 사회 일반에 근대 의식과 민족 의식을 심어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ㄴ. 국어
 a. 국한문체 : 갑오개혁 이후 공문서와 교과서에 국한문체가 사용되면서 언문 일치의 문자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 서유견문(1895) : 유길준이 서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 듣고 본 역사, 지리, 산업, 정치, 풍속 등을 기록한 책으로 국한문 혼용체 보급에 기여하였습니다.

 b. 국문 : 1896년 국문으로 독립신문이 창간된 이래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이 국문으로 발행되었습니다. 국문 신문의 발간은 일반 대중과 부녀자들의 계몽과 직결되었을 뿐 아니라, 언문일치의 움직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국문연구소(1907) : 학부 안에 주시경, 지석영 등의 주도로 국문연구소가 만들어져 국문의 정리와 국어의 이해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문의 글자체부터 철자법 등을 연구하였고, 국어의 발음 등 우리말의 체계를 잡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유길준의 조선문전(1895), 이봉운의 국문정리, 지석영의 신정국문, 주시경의 국어문법과 말의 소리 등이 저술되었습니다.

 ㄷ. 국사
 a. 교과서 : 갑오개혁 이후 근대 학교가 설립되면서 각종 국사 교과서도 편찬되었습니다. 이때 교과서 편찬에 참여한 이는 장지연, 김택영, 현채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쓴 왜곡된 한국사 서술의 영향을 받아 임나일본부의 설치와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을 인정하는 등 문제점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b. 역사서 : 항현의 매천야록과 정교의 대한계년사 그리고 김택영의 역사집략 등이 저술되었습니다. 출판법 제정 이후 현채의 중등교과 동국사략과 유년필독(1907) 등 민족 교육의 지침서가 되었던 국사 관련 서적은 발매가 금지되고 압수되었습니다.

 c. 근대 계몽 사학 : 애국 계몽 운동기 신채호, 박은식 등의 활약에 힘입어 근대 계몽 사학이 성립되었습니다. 나라를 구한 위인의 전기를 써서 보급하고, 외국의 건국과 흥망의 역사서를 번역하여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키우고,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역사서로는 월남망국사, 이태리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성웅 이순신전, 김유신전, 미국독립사, 서사건국지 등이 있습니다. 최남선, 박은식 등은 조선광문회(1910)를 조직하여 실학자의 저서를 비롯한 고전을 다시 간행하여 보급하였습니다. 민족 고전을 출간하여 민족 의식을 높여주려는 출판 활동입니다.

 3) 신문
 ㄱ. 1880년대
 a. 한성순보(1883. 10) : 동문학의 부속 기구로 박문국을 설치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순한문의 한성순보를 창간했고,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습니다. 한성순보는 국민의 견문을 넓히고 국민을 교화하여 나라를 부강케 하여 외국의 침략을 막자는 입장에서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b. 한성주보(1886. 1) : 한성주보는 근대 사상을 보급하고 세계 사정을 전파한 신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광고는 1886년 한성주보 제4호부터 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ㄴ. 1890년대
 a. 독립신문(1896. 4) : 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서재필이 창간한 민간 신문으로 1899년 12월 폐간하였습니다.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습니다. 평이한 문체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지방에까지 지사가 설치되었습니다.

 b. 매일신문(1898) : 배재학당의 협성회 회보가 일간으로 발전된 것으로 이승만이 신문 제작에 참여하였습니다.

 c. 제국신문(1898) : 이종일과 이승만이 창간한 제국신문은 하층민과 부녀층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국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일반 서민층에게 국문을 해독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자아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d. 황성신문(1898) : 개신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되어 장지연, 유근, 박은식, 남궁억, 신채호 등 애국 계몽가들이 주필로 활약하였습니다. 국한문 혼용체로 일제의 침략 정책을 폭로, 규탄하며 국민 계몽에 주력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사설을 통해 을사 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조약 체결에 협력한 정부 대신들을 규탄하며 온 국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ㄷ. 1900년대
 a. 대한매일신보(1904) : 영국인 베델이 양기탁과 합작으로 경영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 신채호 등 신민회의 주요 인사들이 주필로 활약하여 일제의 침략 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국한문판, 영문판, 순한문판으로 발행되어 당시 최대의 발행부수를 냈으며 영국인 소유로 되어 있었으므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서 배일 사상을 고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과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폭로, 규탄하였고 항일 의병 운동과 친일파 암살 활동 등을 상세히 보도하여 항일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다만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한일 합병 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하였습니다.

 b. 만세보(1906) :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후원 아래 권동진, 오세창 등이 창간한 만세보는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되었고 한문에는 반드시 한글로 토를 달았습니다. 실력 양성론에 입각하여 지식 계발과 풍속 개량에 관심을 갖고,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주로 비난하였습니다. 후에 이인직이 인수하여 대한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간행되었습니다.

 c. 경향신문(1906) : 천주교에서 발간한 순국문의 주간지로서 1910년 12월 폐간된 신문입니다. 국민 계몽, 천주교인의 권익 보호, 교회 자체의 기관지의 필요성에서 발간했고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하였습니다.

 d. 대한민보(1909) : 오세창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협회의 기관지로 창관된 대한민보도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의 지식 계발에 발행 목적을 두었습니다. 대한민보는 국민의 사상을 통일하여 민족의 위기를 타개할 것을 강조했으며 일진회의 합방 성명이 발표되자 국민들에게 그 부당성을 폭로하며 합방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e. 해외 : 미국 교민이 신한민보를, 연해주 교민이 해조신문을 각각 발간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ㄹ. 일본의 대응 : 일본은 한국 언론의 구국 계몽 활동에 당황하여 한성신보, 국민신보, 경성일보, 대한신문, 대동일보, 시사신문 등 친일 신문을 발행하여 대응하였습니다.
 * 언론 탄압
 신문지법(1907) : 일제는 반일 보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신문에 대한 사전 겸열을 시도하였고,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습니다.

 신문지법 개정(1908) : 신문지법은 한국인의 명의로 발행하는 신문에만 적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통감부에서는 외국인이 발행한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규제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개정하였습니다.

 출판법(1909) : 출판법을 제정하여 모든 출판물의 원고를 사전에 검열하였습니다.


 3. 종교 : 개항 이후 종교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서양 종교의 포교가 자유로워진 점입니다.
 1) 천주교 : 1886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서울 및 인근 지역에 전파되었습니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애국 계몽 운동기에는 경향신문을 발행하는 등 언론을 통해 애국 계몽 운동 대열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기도회를 개최하고 국채 보상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2) 개신교 : 1880년대에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교세를 넓혀 갔습니다. 미국 선교사 알렌이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 공관 소속 의사 자격으로 조선으로 입국했고(1884), 다음 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의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선교와 함께 서울과 평양 등 전국 각지에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서양 문물의 수용에 기여하였습니다. 선교 과정에서 한글의 보급, 미신의 타파, 평등 사상의 전파, 근대 문명의 소개 등 사회, 문화 면에서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

 3) 천도교(1905) : 동학 교도인 이용구가 친일 단체인 일진회와 시천교(1907)를 창설하여 동학의 전통을 왜곡하게 되자 동학 혁명 당시 북접의 지도자였던 손병회는 이에 대항하여 천도교를 창설하여 전통성을 이어가면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자주 독립의 실현을 위한 민족 교육 사업, 민지 계발과 문명 개화를 위한 언론 출판 사업, 민족 의식의 고취를 위한 국민 계몽 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의 학교를 인수해서 교육, 문화 사업에 힘썼습니다. 천도교의 기관지 만세보를 발행했는데 그 목적은 국민 계몽에 있었습니다.

 4) 대종교(1909) :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창시되어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나철, 오기호, 이기 등 호남 출신 지식인들은 예로부터 민간 신앙으로 전해 오는 단군 신앙을 현대 종교로 발전시켜 국수주의 경향이 가장 강한 종교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대종교는 국권 피탈 이후로는 만주로 본부를 옮겨 애국 계몽가들과 의병 출신 애국지사들을 입교시켜 항일 독립 운동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5) 유교 : 일제는 대동학회를 만들어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유학의 약점을 버리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에 적합한 부분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민족 종교로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 대동교(1909) : 박은식, 장지연 등 개신유학적인 애국 계몽 인사들은 유교적 전통을 국권 회복에 동원하고자 대동교를 창간하였습니다. 대동교는 전통 사상인 유교를 개혁하여 이를 구심점으로 민족의 단합을 유도하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 유교 구신론(1909) :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제창하면서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양명학의 지행합일과 사회진화론의 진보 원리를 조화시켜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6) 불교 : 일본 불교의 침투에 대항하면서 민족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한용운은 조선 불교 유신론을 내세우며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의 회복을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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