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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대의 경제


 1. 개항과 무역 확대
 1) 1870~80년대 무역
 ㄱ. 1870년대 : 개항장에서는 감리서, 개항장 경무서, 개항장 재판소를 두고, 최고 행정관인 감리가 개항장을 관리하였습니다. 영사 사무 관계가 많은 개항장에는 각국이 영사관을 두어 자기 나라의 권익 확보와 보호에 힘썼는데 이곳은 외국인에 대해 국내법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또 조약에는 관세 부과에 관한 규정이 없었으며, 거래에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개항 초기에는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 10리 안에 한정되어 보부상과 같은 조선 상인이 이를 사서 개항장의 조선인 객주, 여각에게 넘기면 일본 무역 상인들이 그것을 사서 일본으로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개항장을 통하여 쌀, 콩, 쇠가죽 등을 주로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영국제 섬유류를 주로 수입하였습니다. 외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고, 국내의 곡물이 대량으로 수출되는 무역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한편 1876년 부산에 사설 제일은행이 설립되었다가 1878년 국립 제일은행 지점이 설치되었습니다.

 ㄴ. 1880년대 : 개항 초기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본과 청국 상인은 내륙 통상이 허용되자 1890년 무렵부터는 내륙으로 들어가 생산지나 포구의 객주와 직접 거래하거나 객주를 포함하여 농촌 소상인까지 장악해 나갔습니다. 일본인의 활동 범위가 1884년에는 개항장 밖 100리로 확대되었고, 1885년부터 외국인의 내륙 지방 여행이 허가되어 일본 상인들이 생산지에 가서 곡물을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 상인은 일본산 면제품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공산품을 들여왔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여 외국 상인이 서울에 점포를 열고 국내 곳곳을 다니며 영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청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되면서, 조선과 청의 무역 규모는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 규모에 육박할 만큼 급성장을 보였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주로 인삼과 해산물을 수출하고 영국제 면제품을 사들였습니다.

 2) 경제 변화
 ㄱ. 국내 경제 : 값싼 외국산 면제품은 가내 수공업 위주로 이루어진 국내의 면공업 발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고, 이에 따라 농민의 수입도 줄어들었습니다. 또 일본으로 쌀의 유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쌀 부족과 쌀값 이산에 따른 전반적인 물가 인상이 나타나 도시나 농촌의 가난한 사람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일부 지주와 상인은 쌀 수출에 적극 가담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고, 이를 다시 토지 매입에 투자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토지를 획득함으로써 대지주로 성장해 갔습니다.

 ㄴ. 토착 상인 : 청나라와 일본 상인이 서울 시장에 침투하여 수입품만이 아니라 시전 상인의 전매 품종인 백목면, 명태 등의 국내 생산품까지 취급하였습니다. 상권을 침해 받은 시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 점포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맹 철시를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공인들은 개항 후 근대적 상인으로 변모하지 못하고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정부에 대한 조달 이외에 다른 상로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강 상인은 개항 후 세곡 운반이 일본인 증기선에 독점됨으로써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일부 상인은 증기선을 구입하여 이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평양 상인은 개항 초기부터 수출입 상품의 유통에 종사했으나 평양이 개시장이 되고 남포가 개항된 후에는 일본 상인에게 상권을 침탈당했습니다.

 3) 경제 자립 노력
 ㄱ. 무역 구조 개선 : 조선 정부는 약탈적 무역 구조를 시정하고 경제 자립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1882년 미국과의 통상 조약과 1883년에 발표된 '조일 통상 장정' 및 '해세세칙'에서는 어느 정도 관세 자주권과 곡물 수출 금지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ㄴ. 상회사 : 정부는 국내 상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업 조합으로서 상회사를 건립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관료와 객주 및 일반 상인이 참여한 상회사는 평양의 대동 상회, 서울의 장통 상회를 비롯하여 30여 개에 달했는데, 이들은 영업의 독점권과 세금 징수권을 정부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 운송 기능을 근대화하기 위해 기선 회사, 이운사 등 관영 운송 회사를 설립하여 세곡 운반을 전담시켰습니다.

 ㄷ. 상인 보호
 a. 혜상공국(1883) : 영세 상인인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혜상공국을 설치하였습니다.
 b. 상리국(1885) : 보부상이 어용 독점 행상으로서 권한을 갖게 되자 보부상을 남침하며 폐단을 일으키는 무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보부상으로 일어나는 폐단을 척결하기 위해 혜상공국은 상리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ㄹ. 방곡령 : 1883년 조일 통상 장정을 체결하여 국내 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 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89년과 1890년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과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실시한 방곡령은 일본의 압력을 받은 정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그대로 강행하여 외교적인 마찰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두 지방의 방곡령은 일본 측의 강력한 항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측에 11만 원의 배상금을 물어주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방곡령은 이후에도 부분족으로 시행되다가 1894년 1월에 전면 해제되었습니다.


 2. 열강의 경제 침투 확대와 대응
 1) 청일 전쟁 : 1890년대 전반까지 수입 면제품의 대종을 이룬 영국산은 일반 소비자로부터 별로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방직업은 한국의 전통 면포를 연구하여 유사한 제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양질의 값싼 면제품이 대량으로 들어오자 한국의 전통 면직업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또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개항장 주변에서 외국인의 토지 침탈이 강화되었습니다. 곡창 지대 특히 곡물의 운송과 유통이 편리한 지역의 토지를 대상으로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외국 상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의 몰락이 가속화되었습니다.

 2) 아관파천 : 1896년에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자,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최혜국 조항은 구미 열강이 이권을 침탈하는 중요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최혜국 조항이란 조선 정부가 한 나라에게 경제 이권을 넘겨주면 다른 나라에게도 기회균등의 차원에서 같은 수준의 이권을 주어야 한다는 불평등한 조항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재정, 군사 고문으로 앉히고 경원, 종성의 광산 채굴권이나 압록강, 울릉도 삼림 벌채권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국은 황실과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 등을 앞세워 당시 조선 전체 금 생산량의 약 1/4을 생산하던 운산 금광 개발권을 비롯하여 경인선 철도 부설권과 서울 시내 전기, 수도 시설권, 서울 전차 부설권을 차지했습니다. 영국에는 은산 금광 채굴권, 독일에는 강원도 당현 금광 채굴권, 프랑스에는 경의 철도 부설권과 창성 금광 채굴권을 각각 양도하였습니다. 일본은 경부선 철도 부설권, 경인선 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 매입), 직산 금광 채굴권 등을 차지하였습니다.

 3) 식산흥업과 상권 수호 운동 : 대한제국기에 들어 외세의 경제 침탈을 막고 근대적인 국민 경제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정치 및 행정을 맡은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식산흥업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정부는 화폐 제도 개혁과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전, 현직 관리와 민간의 자본을 모아 근대적 기업 설립에 나섰습니다. 산업 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 설립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민간에서는 농기구나 일용품을 만들던 철기 및 유기 제조업, 정미업, 직포 공업 등에서 공장을 늘리고 새로운 기계를 외국에서 들여오거나, 자본을 모아 합자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자본의 성장으로 대한협동우선회사, 인천우선회사, 인한윤선주식회사 등 비교적 큰 규모의 해운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이운사, 통운사 같은 육운회사, 부하철도회사, 대한철도회사, 영남지선철도회사 등 철도회사가, 해서철광해서, 수안금광합자회사 등 광업 회사도 설립되었습니다.
 광무 년간에 민족기업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방직업이었습니다. 안경수가 주동이 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 종로의 백목전, 상인이 중심이 된 종로 직조사 그리고 김덕창이 구식 공장을 근대식으로 개조한 김덕창 직조공장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최초로 설립된 조선은행은 관료 자본 중심으로 설립된 은행으로서 국고 출납 업무를 대행하고 지방 중요 도시에 지점을 두었으나 곧 폐쇄되었습니다. 한성은행, 천일은행 등 몇 개의 민간은행이 설립되었는데, 대부분 관료 자본과 상업 자본의 합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 상권 수호 운동 : 독립협회나 황국중앙총상회 등과 같은 단체도 국내 산업 진흥과 상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외국의 이권 탈취 및 경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황국종상총상회는 종래의 금난전권을 잃은 시전 상인들이 대한 제국 시기에 와서 외국상인의 침입에 맞서 상권을 지키기 위해 발족한 상인단체였습니다. 이들은 독립협회의 정치 활동에 동조하여 철시를 단행하기도 하면서 상권 수호 운동을 적극 펴나갔습니다. 그러나 황국중앙총상회가 독립협회와 정부에 의해 해체됨으로써 시전 상인들의 상권 수호 운동은 좌절되었습니다. 그 후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의 결과로 빚어진 금융 공황 때문에 큰 타격을 입은 시전 상인들 중심으로 한성상업회의소가 조직되었습니다.

 정부와 민간의 식산흥업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자본의 축적과 근대적 금융 제도를 확립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 일제의 침략으로 식산흥업 노력은 좌절되었습니다.


 3. 일제의 경제적 예속화와 경제 구국 운동
 1) 일제의 경제 예속화
 ㄱ. 금융 : 러, 일 전쟁 중에 일제는 일본일을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후 일제는 국가의 모든 수입과 지출 과정을 장악하였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금융을 지배하기 위해 1904년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의 지휘하에 구화폐 정기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05년 7월부터 그동안 사용하던 새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하게 하였습니다. 또 대한 제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인을 위한 여러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빌어 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905년에 300만 엔의 차관을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10년에는 그 액수가 4500만 엔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ㄴ. 토지 약탈 : 일제는 러, 일 전쟁 중에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국유지나 황실 소유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이후 여러 가지 구실로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내세워 일본인이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2) 경제적 구국 운동
 ㄱ. 토지 약탈 저지 : 러, 일 전쟁 때 일제가 황무지 개간을 구실로 막대한 국유지를 빼앗으려 하자, 보안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투쟁이 일어나 이 요구를 좌절시켰습니다. 또 중추원 부의장 이도재, 장례원경 김종한 등이 주동이 되어 황무지 개척 사업을 목적으로 농광회사를 설립하고 궁내부와 농상공부에 특허를 청원하였습니다.

 ㄴ. 회사 설립 : 1905년 이후에 일제 침략이 강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회사 설립과 인재 육성에 나선 이들이 많았습니다.

 ㄷ. 국채 보상 운동 : 1907년에는 국민 모금으로 정부가 진 빚을 갚아서 경제 자립과 국권 수호를 이룩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구에서 서상동과 김광제가 시작하였으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이나, 비녀와 가락지 같은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을 성금으로 내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 기관이 필요해짐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하고, 한규설, 양기탁 등 임원을 설출하였으나 일본 통감부의 방해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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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사회


 1. 사회 제도와 의식의 변화
 1) 평등 사회
 ㄱ. 개화 사상과 갑신정변 : 개항 무렵, 일부 양반과 중인 출신 인사들은 개화 세력을 형성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실학 사상을 계승하고 서구의 사상을 받아들여 평등한 근대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문벌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으며,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선언하는 등 사회 전반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습니다.

 ㄴ. 동학과 동학 농민 운동 : 1860년대에 등장한 동학은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라고 하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평등 사상에 기초한 동학은 민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 사회가 타파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ㄷ. 갑오개혁 :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에서 추구하던 신분 제도의 폐지는 마침내 갑오, 을미개혁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고, 천민 신분과 공, 사노비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갑오개혁으로 비록 신분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신분 의식은 아직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

 2) 의식 변화
 ㄱ. 민중 계몽 : 독립 협회는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의 민권 의식과 평등 의식이 성장하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독립신문을 구독하고,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에 참여하거나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 단체나 학회, 언론 활동으로 이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 의식, 민권 의식, 평등 의식이 높아졌습니다.

 ㄴ. 민중 활동 :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에 남녀노소, 지역,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의 사람이 동참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에는 많은 평민층이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신분 의식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2. 의식주 생활의 변화
 1) 배경 : 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과 제도가 들어오면서 서양의 생활 문화도 우리의 생활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생활 모습도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의식주 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2) 의생활
 ㄱ. 남성 : 일부 상류층과 개화 인사는 상투를 자르고 단발하였으며, 한복 대신 양복을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남성의 복장은 예전처럼 바지와 저고리 차림의 한복이었는데, 저고리 위에 마고자와 조끼를 입는 풍습이 새로이 생겨났습니다.

 ㄴ. 여성 : 개화기에 대부분 여성은 전통적인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을 본떠 만든 개량 한복도 등장하였습니다. 개량 한복은 여학생의 교복이나 신교육을 받은 여성의 옷차림으로 자리잡아 갔습니다. 여성의 외출과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두루마기를 외출복으로 입었고, 오랫동안 여성의 얼굴을 가리던 장옷과 쓰개치마 등이 점차 사라지고 양산이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3) 음식 문화 :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여러 가지 음식 문화도 들어왔습니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한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 식사법이 생겨났습니다. 이전에는 남녀가 또는 양반과 상민이 한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수저와 함께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식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궁중과 일부 상류층에는 커피와 홍차, 양과자와 같은 빵 같은 식품과 서양식 요리법, 식사 예절 등이 전해졌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들어온 청나라 상인 중에서 일부는 음식점을 차리고, 중국 요리와 만두, 찐빵, 우동, 어묵, 단팥죽, 단무지, 청주 등 일본 음식을 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외래 음식과의 접촉에 따른 식생활의 변화가 일반 서민의 음식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4) 주택 문화 : 개항 이후 그 동안 신분에 의해 규제받던 주택 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옥의 규모나 건축 양식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과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이 세워지고, 서양인과 일본인이 살게 되면서 서양식 건물이나 일본식 주택이 나타났습니다. 또 관청이나 공공 건물, 학교 건물, 상업용 건물, 종교 건물 등 근대식 건물이 잇따라 세워졌습니다. 1890년대에 들어와 민간에서도 서양식 건축물의 이점을 살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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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정치


 3. 국권 피탈과 국권 회복 운동
 1) 국권 피탈
 ㄱ. 러일전쟁 : 영국은 중국의 의화단 사건(1900)을 함께 진압한 후 만주를 차지하려고 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의 조선 독점을 승인하는 대신에 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제1차 영일 동맹이라고 합니다. 영일 양국은 한청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국에서, 일본은 한, 청 양국에서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가지고 있으므로 타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에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러일 전쟁을 예상하여 미리 국외 중립을 선언(1904. 1)하였습니다. 러일전쟁은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벌어졌습니다.

 ㄴ. 일본의 간섭
 a. 한일의정서(1904. 2) : 한국을 군사적으로 장악한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의정서의 체결을 수둘렀습니다.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 공사 사이에 조인되었습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을 위한다는 미명하게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할 수 잇도록 규정한 조약입니다. 이에 따라 경부 철도(1905. 5. 28)와 경의 철도 그리고 마산 철도의 부설이 강행되었습니다.

 b. 제1차 한일협약(1904. 8) : 외무대신서리 윤치호와 일본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서 조인되었습니다.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습니다.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가 재정 고문으로 와서 재정 정리라는 이름으로 재정권을 박탈하고, 황제가 근대화 사업 기금으로 축적한 황실 재산을 해체시켜 갔습니다. 협정서에 규정이 없는 군부 고문, 경무 고분, 궁내부 고문, 학부 참여관 등을 멋대로 보내 왔습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형식상 주권 국가였으나 실제로는 고문 정치에 의해 실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외국에 나가 있던 대한제국의 공사들도 강제로 소환되었습니다.

 c. 독도 강탈(1905) :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울릉도에 딸린 섬이었던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 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입니다. 

 ㄷ. 일본의 한국 지배 인정 : 일제는 미국과는 가쓰라, 테프트 밀약,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습니다.
 a. 가쓰라 태프트 각서(1905. 7) :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와 일본 외상 가쓰타 타로 사이에 맺어진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의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였습니다.

 b. 제2차 영일 동맹(1905. 8) : 영국도 영일 동맹을 개정하여 일본이 한국을 위해 이른바 '보호' 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c. 포츠머스 조약(1905. 9) : 러, 일 간에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특수 이익과 한국에 대한 보호, 지도, 감리 등의 모든 행동을 러시아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러시아, 일본의 동등한 권리가 인정되었습니다.

 ㄹ. 을사 조약(1905. 11. 17) : 송병준, 이용구 등을 이용하여 일진회라는 친일 단체를 만들어 조약을 찬성하는 취지의 선언서를 사전에 발표하게 하여 여론을 조작하였습니다. 일본 현지에서 증원 병력을 받아 궁궐 내외에 군대를 배치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습니다.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등 을사 5적을 내세워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 조약'을 강요하였습니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서 조인되었습니다. 을사 조약의 기본 내용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여 일본의 승인이 없이는 어느 나라라도 교섭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일본인 통감을 둔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여 서울에는 통감부를 개설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을 설치하였습니다.

 ㅁ. 한일 신협약(1907. 7) : 고종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비밀 특사를 보내는 한편,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했습니다. 고종은 을사 조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여 세계 열강의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평화를 가장한 것일 뿐 조선과 같은 나라는 참가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서울의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일본 혼성 1여단 병력이 급파되고 외무대신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하는 등 강압적 분위기에서 가결되었습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후작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조인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으로는 국가의 법령 제정, 중요 행정 처분, 고등 관리의 임명에 대한 사전 승인을 통감으로부터 받도록 하였고,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였습니다.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습니다.

 ㅂ. 한일합병
 a. 기유각서(1909) :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 사이에서 조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각서입니다.

 b. 간도 협약(1909) : 일제는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성권을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청에 넘겨주었습니다.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c. 경찰권 박탈 : 1910년 5월 일본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새 통감으로 임명하고, 2천여 명의 헌병을 데리고 들어와 경찰 업무를 담당케 하고, 항일 언론 기관과 애국 단체들을 탄압한 가운데 드디어 8월 29일 황제로 하여금 양위의 조사를 내리도록 강요하였습니다.

 f. 한일합병 조약(1910. 8. 22) :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티 마사타케 사이에 병합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2) 국권 회복 운동
 ㄱ. 항일 의병 운동
 a. 을미의병 :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의병은 대개 지방의 유생들이 주도하여 갑오개혁의 법령을 시행하는 관찰사, 군수 등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처단하거나 문책하면서 그들을 진압하려는 관군 및 일본군과 항전하였습니다.
 친러 정권의 단발령 철회와 친일 요인의 단죄, 미납 조세의 탕감 조치,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 발표 등으로 의병은 대부분 자진 해산하였습니다. 정부의 회유 정책을 거부한 유인석과 민용호 부대는 만주 지방으로 이동하여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b. 을사의병 : 1905년 일본이 을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고종의 재가도 없이 이를 선포하자 의병들은 다시 봉기하였습니다. 을사 조약의 폐기와 을사 5적의 처벌을 요구하고,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국적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의병 활동이 치열했던 곳은 충청, 전라, 경상도 지방으로서 그 지도자는 유교를 숭상하는 전직 관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는 농민들이 전투 병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광무 연간에 활동하던 동학당, 영학당, 화적, 활빈당 등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의병장
 민종식 : 1906년 3월 충청남도 정산에서 전 참판 민종식이 1000여 명의 의병을 조직하고 5월 홍주성을 단숨에 점령했습니다. 그는 다른 의병 부대와 군주에서 연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최익현 : 1906년 6월에는 전라북도 태인에서 최익현이 임병찬과 함께 1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으로 나아갔습니다. 최익현은 11월 순창에서 정부군과 마주치자 '동족 사이의 살육전은 피해야 한다.'며 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자신도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쓰시마섬에서 순절하였습니다.

 정용기 : 경상북도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용기는 600여 명으로 산남창의진을 편성하고 청하, 청송 지방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신돌석 : '태백산을 나는 호랑이'로 불렸던 평민 출신 신돌석은 경상북도 영해에서 300여 명의 농민을 모아 봉기하였는데, 강원도 경상도의 해안 지역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3000여 명의 대부대로 성장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c. 정미의병 :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습니다. 서울의 시위대, 김덕제와 민긍호가 이끈 원주 진위대, 지홍윤 유명규 등이 지휘하는 강화 분견대 등 해산된 군대가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특징으로는 양반 유생 이외에도 해산 군인, 평민, 천민 의병장이 등장하게 되었고 다양한 계층의 민중들이 의병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 비해서는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과 평민 의병장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 의병 연합과 서울 진공 작전 :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은 전국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동시에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국제공법상의 전쟁 단체로 인정하고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경기도와 충청도 등 중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양반유생 의병장들은 1907년 12월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 의병 부대를 결성했습니다.
 1908년 1월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부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뒤따라오던 의병의 진격이 늦어지면서 서울 진공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연합 의병의 서울 진공 계획이 실패한 것은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받고 의병을 해산한 사상적 한계와 근대적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과 유격전 대신에 전면전을 택한 전술적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것은 이곳이 개항 뒤 일제의 경제 침탈이 집중되어 어느 지역보다도 민족, 계급적 모순이 극심했고, 의병 부대 안의 결속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d. 남한 대토벌 작전 : 일본군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호남 지방을 해안과 육지에서 완전히 봉쇄한 뒤 마치 빗질을 하듯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였습니다. 일본군이 지나간 곳은 무자비한 상륙, 방화, 약탈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약 2개월의 토벌 기간에 체포, 학살된 의병 수가 의병장 103명, 의병 4138명이나 되었습니다.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호남 의병이 무너지면서 의병 항쟁은 차츰 중부 이북 지방과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의 산악 지대로 옮겨 갔고 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합병 이후에는 중국 동북(간도),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가서 독립군에 가담하였습니다. 통화, 집안 지방의 유인석 부대, 장백, 임강 지방의 이진룡 부대, 환인 지방의 조채준 부대, 장백현의 홍범도 부대 등은 그 대표적 무장 투쟁세력이었습니다. 합병 후 국내 의병활동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914년 의병 전쟁의 지도자급 인사들에 대한 비밀 결사 독립 의군부에 대한 검거 사건을 고비로 조직적인 활동은 사라져 갔습니다.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 운동이었습니다.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과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하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ㄴ. 의거 활동
 a. 장인환, 전명운 : 1908년 3월 한국 외부고문 스티븐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 정치를 찬양하고 한국인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폭언을 하자, 전명운과 장인환이 그를 사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의 한국 독립 운동 전선에 전환점을 마련했고 해외 항일 운동이 연합전선을 펴는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b. 안중근 의거 : 1909년 7월 일본 각의는 '한일 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켰습니다. 10월에는 한국 병합과 연계되어 있는 만주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만주를 여행중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의병 지휘관 안중근이 사살했습니다. 안중근은 곧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10년 3월 6일 순국했습니다.

 3) 애국 계몽 운동
 ㄱ. 사상
 a. 사회진화론 : 사회진화론은 유길준, 윤치호와 같이 일본이나 미국 유학 출신자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전후 조선 사회가 식민지 상태로 변화해 가던 위기감 속에서 중국인 양계초의 음빙실문집 책과 글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사회진화론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계몽 운동가들은 당시 국제 관계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치열한 힘의 각축 시대로 인식하여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제국주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을사 조약을 전후하여 서울 및 지방 도시의 자산가, 지식인, 관료 그리고 개혁적 유학자들은 교육, 언론 등 문화 활동과 산업 진흥을 통해 문화, 경제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평화적인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정치 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을사 조약 이후에는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국권 회복과 동시에 국민 국가 수립이라는 민족 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했으며, 애국 계몽 운동가들의 근대적 민족 교육과 민족 산업의 진흥 및 독립군 기지의 건설은 장기적인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어 항일 투쟁의 성과 면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제국주의 국가가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론인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일제의 국권 침투와 경제적 침투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의병을 폭도라고 비난하고 자신들의 활동을 국법 이내로 제한하며 일제의 침략 현실에 순응해 갔던 것입니다.

 ㄴ. 을사 조약 이전
 a. 보안회(1904) : 원세성, 송수만, 심상진 등은 보국안민을 뜻하는 보안회를 조직하여 일본이 황무지 개척을 구실로 토지를 약탈하려 하자 대중적인 반대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상소와 언론을 통한 반대 운동을 대규모 집회 운동으로 확대, 발전시켰으며, 지방에서는 의연금을 보내고 상인들은 철시를 단행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보안회의 장서를 게재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곧 해산되었습니다.

 b. 헌정연구회(1905) : 윤효정, 이준, 양한묵 등은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의회 제도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의 수립을 목표로 활동했으나 통감부가 설치된 직후에 정치 집회가 금지되면서 해산되었습니다.

 ㄷ. 을사 조약 이후
 a. 대한 자강회(1906. 4) : 헌정연구회를 이끌었던 윤효정이 장지연, 심의성 등과 함께 조직한 것이 대한 자강회였습니다. 자강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강의 방책을 연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교육을 진작하고 식산을 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육 개발과 식산흥업, 외세 배격 등을 내걸었던 대한자강회는 전국적 규모의 단체로서 전국에 25개의 지회를 두고, 월보를 간행하는 등 활동을 넓혀 갔습니다. 계몽운동을 대중화하고 활성화하였던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고종의 양위가 강제로 이루어지자 철저히 항거하였습니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고종을 퇴위시킨 후 보안법을 만들어 대한자강회를 강제로 해체시켰습니다.

 b. 대한협회(1907. 11) : 대한자강회가 해산되자 다시금 천도교의 오세창, 권동진 등과 합세하여 대한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대한협회는 전국 70개소에 지회를 둘 정도로 그 세력이 컸습니다.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 재산의 보호, 행정 제도의 개선, 관민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 의무, 책임, 복종의 사상 고취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국권 회복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문명화와 개인의 인권, 국민 자격의 획득과 같은 것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일제의 통감부 통치를 문명 지도로 긍정하면서 그 속에서 의회 정치, 정당 정치 구현에 목표를 두고 있어서 친일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c. 신민회(1907) :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이승훈 등 평안, 함경도 출신의 실업인, 지식인, 종교인과 신채호, 이동녕 등 충청도 인사들이 비밀 결사로 조직되었습니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정치 체제의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습니다. 
 이승훈이 평북 정주에 세운 오산 학교,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윤치호 등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 학교, 이동휘에 의해 설립된 보창 학교 등이 설립되었습니다.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1909년 7월 평양, 서울, 대구 등지에서 이승훈과 안태국을 중심으로 태극서관을 설립하였습니다.
 국권 상실이 기정사실로 되면서 회원들 사이에 실력 양성에 주력하려는 온건파와 무력 투쟁을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에 노선의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실력 양성파는 나라가 망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을 조직하여 무실역행의 문화 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이동휘를 대표로 하는 무력 투쟁파는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독립군 기지 창건 사업의 선발대 이동녕과 이회영 5형제 등은 1910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여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토지 개간과 농업 경영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위한 민단으로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관 양성 기관으로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를 창설하였습니다.
 국내에 남아 있던 인사들은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을 검거하고, 105인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져 흔히 105인 사건(1911)이라고도 부릅니다.

 d. 학회 설립 : 교육과 식산흥업에 역점을 둔 각종 학회가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이 학회들은 기관지를 발행하여 애국 사상과 민족 사상을 고취하고, 사립 학교를 세워 애국지사를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학회는 이름은 학술 단체였지만 사실상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정치, 사회 단체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평안, 황해도 서우학회, 한강 이북 지방의 한북흥학회, 전라도의 호남학회, 강원도의 관동학회, 경상도의 교남학회 등이 대표적 학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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