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민족 문화 운동


 1. 국학 운동
 1) 국어 연구
 ㄱ. 조선어 연구회(1921) : 3.1 운동 이후 한말의 국문연구소의 후신으로 임경재, 장지영, 김윤경 등의 주도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습니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습니다.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습니다.

 ㄴ. 조선어학회(1931) :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한글 교육에 힘써 한글 교재를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회원들이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글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대중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동아일보 등 신문사와 제휴하여 전국적으로 조선어강습회를 열었습니다.(1931) 또 중단된 한글 잡지를 조선어학회가 같은 이름으로 계승하여 일본의 탄압으로 강제 폐간당한 1942년까지 93호를 발간하면서 국어의 학술적 연구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습니다. 훈민정음 언해본(1932),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 등을 발간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펀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2) 국사 연구
 ㄱ. 일본의 식민 사관
 타율성론 :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과 한반도 지역의 독립된 역사성 및 문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그 요지는 한반도 지역의 역사가 그 주민의 자발적 활동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중국, 만주, 일본 등 주변 민족의 자극과 지배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종류로는 임나일본부설, 만선사관론, 반도적 성격론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정체성론 : 정체성론은 주로 어용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이들은 20세기 초 한국의 경제 조긱과 경제 단위가 일본 10세기 초인 고대 말기에 해당할 정도의 후진 사회였다는 주장입니다.

 당파성론 :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을 지적한 것으로, 한마디로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를 당쟁이라 표현하고 그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일선동조론 :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하나다." 라는 이른바 일선동조론은 일본서기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아버지라는 스사노 오노미코토가 신라에 강림하여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인과 한국인은 같은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일 병합'은 당연하다는 주장입니다.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일선동조론을 내세워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강제 징용과 강제 징병 등 일제의 침략 전쟁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데 적극 이용했습니다.

 ㄴ. 연구 방법 :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사를 수호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론이 체계화되어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이 대두하였습니다.

 * 민족주의 사학 :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박은식 : 우리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일본의 침략 과정을 소개한 한국통사(1915)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소개한 한국 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신채호 : '낭가 사상'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습니다. 저서로는 꿈하늘(1916), 조선상고문화사를 저술하여 단군 조선의 문화와 정치사를 쓰고 대종교와 연결되는 전통적 민간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혁명 선언'에서는 지배층 위주의 유교적 사관인 사회진화론을 부정하고 민족적 민중에 의한 재발전을 강조하였습니다. 조선사연구초(1925)나 조선상고사(1931)에서는 사대적 유교 사관을 비판하고 민족 항생사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 고대사를 새로이 체계화시켰습니다.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에는 정인보, 안재홍 등이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정인보 : 조선사연구에 실린 '5천년 간 조선의 얼'이란 글에서, 역사의 본질을 '얼', 즉 민족 정신에서 찾는 '얼 사관'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의 척추인 얼의 반영이며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곧 이 얼의 줄기를 세우는 일이라 했습니다. 주요 활동으로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하였고, 광대토대왕릉비를 연구하여 일본인의 잘못된 고대사 연구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양명학과 우리 나라의 5천년의 얼을 정리하여 민족 정기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문일평 : 민족 의식,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일원적 정신을 제시하였고 조선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심의 결정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종과 실학자들의 민족 지향, 민중 지향, 실용 지향을 높이 평가하는 사론을 발표하여 일반 국민의 역사 의식을 계발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국제 관계에서 실리적 감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이런 시각에서 대미관계 50년사라는 명저를 내기도 하였는데, 그의 저술은 호암 전집(1939)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었습니다.

 * 사회 경제 사학 :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습니다.
 백남운 : 조선 사회 경제사(1933)와 조선 봉건사회 경제사(1937)를 지어 처음으로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세계의 제 민족과 같은 궤적에서 일원론의 변증법적 역사 발전 법칙에 의해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실증주의 사학 : 한국 학자들이 세운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사학도 발달하였습니다. 개별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순수 학술 활동을 목표로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한국사를 연구한 학풍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순수 학문을 포장하면서 식민주의사학에 학문적 대응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진단학회(1934) : 일본인 학자들의 주도로 조직된 청구학회(1930)에 자극을 받아 진단학회를 조직하였고, '진단학보'라는 학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병도, 이상백, 김상기 등의 역사 학자와 이윤재, 이희승 등 국어 학자, 송석하, 손진태 등 민속 학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독립 운동에 직접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문화사 연구의 지평을 열어 주었고, 역사학을 비롯한 국학 전반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 신민족주의 사학 : 문헌 고증을 토대로 하고 사회경제 사학을 수용한 바탕에서 민족 사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안재홍과 손진태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안재홍 : 극좌와 극우를 배격하고 만민공생의 통합된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를 계승, 발전시켜 고대 국가의 사회 발전 단계를 해명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해방 후 조선상고사감(1947)이라는 단행본을 엮어냈고, 우리나라의 전통철학을 정리하여 불함철학대전(1940)과 조선철학(1944)을 저술하였습니다.

 손진태 : 안재홍의 영향을 받아서 지배 계층 위주의 봉건적 사관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계급 사관을 비판하였으나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신민족주의 사관을 확립했습니다. 대내적인 사회 발전 논리와 대외적인 민족 성장 논리를 결합하되 "계급의 생명은 짧고 민족의 생명은 길다"고 하여 계급 투쟁보다는 민족 균등의 입장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역사 이론은 신채호의 이론을 발전시켜서 투쟁과 화합의 양면성을 추구했습니다. 저서로는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에서는 정치, 경제 형태와 민족 균등의 발전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 신라를 민족 결정기로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손진태 등에 의한 민속학 연구도 활기를 띠었으며,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유출을 막는 데 힘썼습니다.

 3) 민족 교육과 과학 대중화 :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시도되었습니다.
 ㄱ. 민립대학설립운동 : 1920년대에는 조선여자교육회와 조선교육회가 창립되어 교육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을 통해 최고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도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ㄴ. 문맹퇴치운동 :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차별 교육 정책으로 인하여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문맹자가 증가하였습니다. 문맹자의 증가는 민족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바로 일제가 목표로 하였던 한국인의 우민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3.1 운동을 계기로 문맹 퇴치가 급선무임을 자각하여 이를 실천에 옮겨 갔습니다.
 대한 제국 시기 이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개량 서당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20년대 이후에는 야학이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기관과는 달리, 우리 글과 말, 역사를 교육하여 항일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습니다. 일제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야학을 탄압하여 문을 닫게 하였고 '1면 1교주의' 시책을 강행하여 공립 보통학교를 증설하였으나 이에 수용된 한국 아동은 학령 아동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주 사변 이후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야학과 개량 서당 등 민족 교육 기관은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한글 보급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은 언론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문자보급운동 :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방학 중에 귀향하는 중등 이상의 남녀 학생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 문맹 퇴치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브나로드 운동 : 동아일보는 1931년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브나로드운동은 당시 2천만 국민 중 80%에 가까운 1600만 명이 문맹자라는 심각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 절약 등 생활 개선을 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어학회 : 언론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어학회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협조하였습니다. 문자보급운동에 사용될 교재를 만들었으며 대부분 사립 학교 교원으로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솔선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글 강습회를 열었습니다.
 운동이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산되자 조선 총독부의 탄압이 가혹해졌고, 결국에는 대규모의 순회 강습이나 문맹퇴치운동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져, 민족 교육 운동으로서의 문맹퇴치운동은 중단되었습니다.

 ㄷ. 과학대중화운동 : 일제의 교육 정책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낮은 수준의 실업 인력을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선진 근대 과학 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항공기는 과학 기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1922)은 우리 민족에게 큰 감명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비행술은 "우리도 하면 된다."라는 자신과 긍지를 온 민족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지와 잡지 등에서도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습니다.
 발명학회(1924) : 발명학회는 과학 종합 잡지인 과학 조선의 간행과 '과학의 날' 제정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과학 지식을 보급하였습니다. 과학 지식 보급회를 설립하여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으며, 과학 도서의 편찬과 간행, 강연회, 전시회 등의 개최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나, 1930년대 말 일제의 강요로 일제가 만든 과학 단체에 강제로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학 진흥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과학 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2. 문예 활동
 1) 종교 활동 :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종교 단체들은 다양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ㄱ. 천도교 : 3.1 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문화 운동을 표방한 민족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습니다. 개벽, 부인, 신여성, 학생, 어린이, 조선농민 등 많은 출판물을 발간하여 민중의 자각과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제2의 독립선언운동을 계획하였고, 사회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문화 발달과 수호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ㄴ. 대종교 :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대종교는 일제의 심한 탄압을 피해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과 북로군정서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일제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미쓰야 협정을 맺으면서 대종교의 불법화를 관철시켰습니다.

 ㄷ. 기독교 : 기독교는 천도교와 함께 3.1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3.1 운동의 지방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많은 신자가 투옥되거나 학교가 폐쇄되기도 하였습니다.

 ㄹ. 천주교 : 개화기 이래 전개해 온 고아원, 양로원의 설립 등 사회 사업을 계속 확대시켜가면서 경향 등의 잡지를 통해 민중 계몽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일부 신자는 만주에서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습니다.

 ㅁ. 불교 : 사찰령(1911)으로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나누고 본사의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총독에게 주지 임명과 사찰 재산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한 악법이었습니다. 한용운 등은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통합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에 과감히 맞서서 민족 종교의 자세를 견지하였습니다.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여 한용운의 조선 불교 유신회(1921)를 중심으로 불교계 정화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 불교 유신회는 사찰령의 폐지와 천일주지 성토운동을 벌였으며, 근대적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ㅂ. 원불교(1916) :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현대화를 주장하면서 민족의 자립 정신 고취와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립 정신을 키워갔으며, 남녀 평등, 허례허식의 폐지 등 새생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ㅅ. 유교 : 일제는 한일 병합 이후 일제의 침략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유림 세력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경학원 규정을 공포하고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전국의 향교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국외에 망명하거나 의병 투쟁과 무력 항쟁을 계속하는 한편 교육 사업과 계몽 운동, 독립 청원을 통해 항일 독립 의식을 고양하고 전통 문화를 수호하면서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림 세력은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으나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우송하여 파리 장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2) 문학과 예술
 ㄱ. 시대 과제와 일본 통제 :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탄압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후 일제는 모든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조선문인협회, 조선음악과협회, 조선연극협회를 조직하고, 모든 활동을 침략 전쟁과 일제의 식민 통치를 찬양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이와 같은 내용이 아닌 것은 모두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ㄴ. 문학
 1910년대에는 이광수 등의 활동으로 근대 문학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은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 사상, 자유연애의 칭송, 신생 한국의 전망 등을 담은 소설입니다.

 1920년대에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예술성만 추구하고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로 창조(1919)가 있고 폐허(1920), 백조(1922)도 발행하였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습니다. 신경향파 문학은 3.1. 운동 이후 노동자, 농민들이 활발히 조직화되는 추세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순수 예술을 표방하는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문학이 현실과 생활을 반영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한편 프로문학은 극단적인 계급 노선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대중과의 연대성이 약화되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국민 문학 운동을 일으켜 계급주의에 반대하고 문학을 통해 민족주의 이념을 선양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민족 의식과 민족애의 고취, 모국어 사랑, 전통 문화의 부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5, 26),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등이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문학의 분야도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으로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제가 중일 전쟁을 도발하고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시작한 이후 일제는 우리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면서 군국주의 찬양을 강요하였습니다. 이광수, 최남선 등과 같이 일부 문인은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육사, 윤동주 같은 저항 시인의 활동도 활발하였습니다.

 ㄷ. 민족 예술
 음악 부분에서는 1910년대에는 서양 음악에 기반을 두고 창가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국권 피탈 후 학도가, 한양가, 거국가 등 망국민의 슬픔과 일제에 대한 저항적 성격의 노래가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전통 회화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서양식 유화가 새로운 미술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제의 수탈을 비판하는 풍자화도 등장하였습니다. 

 연극은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어느 분야보다 파급 효과가 컸습니다. 3.1 운동 이후 민족 계몽 운동이 확산되자, 동경 유학생들이 극예술 협회를 조직하고 연극 공연을 민중 계몽의 수단으로 삼아 이 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본격적인 근대 연국은 토월회(1923), 극예술연구회(1931)가 조직되어 활동한 이후에 등장하였으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과 강요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연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어를 쓰지 않는 연극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활동은 다른 분야보다 발전이 늦었습니다. 처음 일본 영화의 보조 수단으로 출발하여 한국 영화로 독립하기까지는 자본, 기술, 자재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중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발표한 것은 한국 영화를 획기적으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우리 고유의 향토적인 정서가 은은히 배어 있는 슬픈 가락을 깔고 당시 일제 지배하의 망국의 통분과 슬픔을 자아내는 한편 항일 의식과 애국심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역시 1940년 조선 영화령이 발표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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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경제, 사회적 민족 운동


 1. 경제
 1) 민족 기업 : 일제의 각종 규제로 민족 기업 활동은 큰 회사의 설립보다는 오히려 소규모 공장 건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한국인이 경영한 기업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인 대자본과 경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기업 활동은 경쟁이 심하지 않은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거나, 가내 수공업과 연계를 맺으면서 중소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민족 기업은 순수한 한국인만으로 운영되었으며, 한국인의 기호에 맞게 내구성이 강하고 무게 있는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 유형으로는 지주 출신의 기업인이 지주와 상인의 자본을 모아 대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서민 출신의 상인들이 자본을 모아 대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지주 출신 공장으로는 경성 방직 주식회사가 있고 서민 출신 공장으로는 평양 메리야스 공장이 있습니다.
 한국인 기업 활동이 활발해서인지,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민족 기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 식민 통치 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의 교묘한 탄압으로 해체되거나, 일본인 기업에 흡수, 통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족 기업의 운동은 1920년대에 비하여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ㄱ. 대두 : 일제 강점기에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기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쌀의 반출을 위해 지주를 지원하고, 일본 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농민과 노동자는 소작 쟁의나 노동 쟁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생존권 투쟁이자 경제적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강화해 간 노동자와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킬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초기 노동자, 농민 단체는 지식인이나 자본가, 지주 등도 함께 참여하여 대개 상호 부조직인 계몽적 단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4월에는 최초의 전국적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었고, 노동공제회가 해체된 이후인 1922년 10월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계급적 목표를 분명히 한 조선노동연맹회가 조직되었습니다.
 * 조선노농총동맹(1924. 4) : 전국 260여 개의 노동자, 농민 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여 '철저히 자본가 계급과 투쟁한다.'라는 강령을 내걸었습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전국 노동자, 농민 단체를 거의 망라한 점에서 민중 운동의 큰 진전이었습니다. 다만 계급적 처지와 입장을 달리하는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이 분화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노동자 단체와 농민 단체의 분리를 모색하여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시켰습니다.

 ㄴ. 노동 운동 : 191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아주 적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습니다.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정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태동기(1920~24년) : 초기에는 주로 임금 임하 반대와 임금 인상 요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23년 이후에는 임금 인상 외에도 단체협약권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악질 일본인 감독의 추방, 노동 조건의 개선 등 다양한 요구 조건이 제시되었습니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주로 정미업, 고무업, 양말업 등 비교적 규모가 작은 공장과 공장이 몰려 있던 경기도, 경상남도,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본격화(1925~29년) : 1920년대 후반기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참가 인원도 늘고 파업 지역도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쟁의는 목포 제유공 파업(1925), 영흥 노동자 총파업(1928),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 등입니다.
 * 원산 노동자 총파업 :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1928년 9월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 있던 라이징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총파업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뒤 이 지역의 상급 노동 단체인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절정기(1930~36년경) :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북부 지방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 수도 빠르게 늘어나, 1943년에는 100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더욱 인하하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였으며, 각종 부담금을 강제로 징수하였습니다.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노동쟁의에 대한 통제 또한 크게 강화하였습니다. 일제가 합법적인 운동마저 탄압하자 노동자들은 비합법적 투쟁에 나섰고,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이었습니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은 서울, 원산, 함흥 등 북부 공업 지대를 비롯하여 신의주, 평양, 마산, 부산 등 전국의 공업 지대를 중심으로 바르게 퍼져 갔습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지는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노동조합은 강제 해산되고, 노동 운동은 잠복기에 들어갔습니다.

 ㄷ. 농민 운동 : 러일 전쟁 후, 일본인은 본격적으로 한국에 건너와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한편,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이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한국인 지주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얻은 부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소직 농민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지주가 물어야 할 지세 부담까지 떠맡았고, 마름의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더욱이 소작인은 1년을 기한으로 하는 소작 계약을 강요당하여 생존권마저 위협받았습니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 의식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소잭 쟁의가 발생하였습니다.

 태동기(1920~24) : 농민 운동은 소작인 조합이 중심이 된 소작농의 대지주 항쟁, 즉 소작 쟁의로 펼쳐졌습니다. 소작 쟁의의 목적은 초기에는 주로 소작료 인하에 있었지만, 1923년경부터는 압도적 다수의 쟁의가 소작권 이동 반대 투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암태도 소작 쟁의와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 쟁의(1924)가 규모가 큰 것입니다.

 본격화(1925~29) : 소작인 조합이 농민 조합으로 개편되어 자작농까지 포함하는 보다 대중적인 조직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농민 운동도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 쟁의만이 아니라 수리 조합 등 일제의 경제적 약탈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아갔습니다. 대표적인 농민 운동은 전남 무안군 자은도 소작 쟁의(1925), 전남 구례 농민의 수리조합 반대 투쟁(1927), 전북 옥구군 이업사 농장 쟁의(1927), 평북 용천군 불이흥업 서선농장 쟁의(1927~31) 등입니다.

 절정기(1930~35) :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 투쟁이었던 농민 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변화와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격렬해져 갔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지도를 받아 조직된 농민조합은 전국적으로 약 80여개나 되었는데, 함경도 지방의 농민조합 운동이 가장 격렬하였습니다. 함남 단천의 항일 농민 폭등(1930), 함남 정평의 항일 농민 시위(1930), 함남 흥원의 항일 시위(1931) 등입니다.
 농민들은 일제 타도, 치안유지법 철폐, 민족 차별 폐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획득 등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부분적이기는 하나 '토지는 경작하는 농민에게'라는 토지 혁명의 슬로건이 등장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2. 사회 변화
 1) 사회적 민족 운동
 ㄱ. 청년 운동 :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에 청년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여러 청년 단체가 전국에서 조직되었습니다. 1920년 12월 116개의 청년단체가 모여 결성한 조선청년연합회는 수양과 계몽의 성격이 강한 단체였습니다. 청년단체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청년들을 각성시켰으며, 야학을 열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들을 가르쳤습니다. 또,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1923년 이후 청년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여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등에 대한 지원에 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 조선청년총동맹(1924) :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된 이후 청년 단체들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었습니다. 이와 같은 청년 운동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 조선청년총동맹이었습니다.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 조선민족 해방운동의 선구자를 강령으로 내건 청년총동맹은 노동, 농민 운동을 지지하는 등 여러 부문 운동에 개입했습니다.

 ㄴ. 학생 운동 : 3.1 운동 뒤 더욱 활성화된 학생 운동은 1923년 2월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조선 학생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또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조직으로는 경성학생연맹, 조선학생 과학연구회 등이 조직되었습니다. 특히 1925년 11월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학생 과학연구회는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6.10 만세운동과 신간회 결성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학교마다 사회주의 독서회, 비밀 결사 등이 조직되어 동맹 휴교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에도 각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ㄷ. 소년 운동 : 청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년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0년 진주 소년회가 조직되면서 소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소년 운동은 천도교 청년회가 소년부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그 후 천도교 소년회로 독립하여 어린이날(1922)을 제정하고 기념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소년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23년에는 전국적인 소년 운동 조직인 소년 운동 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전국적 조직체로서 조선소년연합회(1927)가 조직되어 체계적인 소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방정환, 조철호 등은 소년 운동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애국심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들 사이에 사상과 이념의 대립으로 소년 운동도 분열되었습니다. 더구나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일제가 한국의 청소년 운동을 일체 금지하고 단체를 해산함으로써 청소년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ㄹ. 여성 운동 :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 인식도 높아졌습니다. 1920년대 전반기 전국적으로 여자청년회, 부인회 등 수많은 여성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여성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중심 단체로는 조선여자교육회, 조선여자청년회가 있었으며, 종교 계통으로는 조선여자 기독교청년회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야학, 강연회 등을 통한 문맹 퇴치, 풍습 개량, 지식 계발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었습니다.
 1924년 5월에는 주세죽, 허정숙 등이 조선여성동우회 등을 조직하여 여성 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을 결합시켰습니다. 또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을 하게 되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 운동과 대립, 갈등을 보이다가 양측이 통합하여 근우회를 결성하였습니다.

 ㅁ. 형평 운동 :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습니다. 또 학교입학통지서에서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습니다.
 * 조선형평사(1923) : 백정 출신들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창립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창립 목적은 계급의 타파, 공평한 사회의 건설, 모욕적 칭호의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의 향상, 동지의 화목, 협력, 상조 등에 두었습니다. 조선형평사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백정의 인권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부문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차 힘을 잃어 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분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여전히 백정 출신을 차별하였으며,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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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항일 운동


 2. 1920년대 민족 운동
 1) 국내 민족 운동
 ㄱ. 운동 분화 : 1919년 3.1 운동이 좌절된 후, 독립 운동 진영 사이에 이견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독립 운동의 방법과 독립 이후의 국가 체제 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립 운동 진영은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운동 등으로 갈라졌습니다.
 민족주의 세력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독립한 다음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당장은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교육과 산업에서 실력 양성을 주창하였습니다. 이러한 실력양성의 논리 위에서 전개된 대표적인 운동이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언론을 통한 국민 계몽과 문맹퇴치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한편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러시아, 일본,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청년, 지식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소개하면서 사상 단체를 조직하여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국외에서는 1918년 연해주에서 이동휘 등이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시작으로 하여 연해주, 모스크바, 이르쿠츠크 등 지역에 수많은 공산주의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중국과 국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내에서는 각종 청년회, 사상 단체, 노동 운동 단체, 농민 운동 단체가 생겨났습니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과 노선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세력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청년 운동, 소년 운동 등 사회, 경제적 대중 운동의 활성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조선공산당 :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고, 1926년에는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1927년에는 민족주의 좌파와 연합하여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관헌의 가혹한 탄압으로 세 차례나 해체되었다가 재건되는 우여곡적을 거치면서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의 결의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ㄴ. 실력 양성 운동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제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민립대학설립운동 : 한규설, 이상재 등은 조선교육회(1920)를 조직하고 한민족 본위의 민족 교육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여 대학의 설립을 서둘렀습니다. 조선청년연합회와 언론 기관이 적극 협조함으로써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상재를 대표로 하는 민립대학 기성준비회(1922)에서는 경향 각지에 취지서를 보내어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고, 각지에 대표를 파견하여 사회 유지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일제가 조선 교육령을 개정하여 대학 설치를 규정하자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었습니다. 1천만 원을 목표로 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백 여 개의 지방부까지 두고 추진되었으며 만주, 미국, 하와이 등 해외에서도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1923년의 전국적 대홍수, 1924년의 극심한 가뭄 등으로 자금 모집에 실패하여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오산학교, 연희 전문학교, 보성 전문학교 등 대학으로 승격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모두 일본 측의 저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조선인의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당황한 일본은 그것을 탄압하면서, 대신 1924년 관립 대학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치하여 한국인의 고등 교육령을 무마하려 했습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당시 고등교육보다 글을 깨치지 못한 다수 민중을 위한 대중교육이 더 시급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 물산장려운동 : 물산장려운동은 민족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민족 경제의 자립을 기하려는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위해 각지에서 공모한 표어 가운데서 대표적인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우리는 우리 것으로 살자' 등을 보아도 이 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920년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이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조만식 등 70명의 평양 유지들은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하고 자급자족, 즉 조선 물산의 장려를 위한 운동을 펼칠 것을 제창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관세 철폐 움직임에 대흥해야 했었는데 서울에서는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 자작회(1922)를 만들어 물산장려운동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1923)가 조직되었고, 자급자족, 국산품 애용,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활발하게 추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국산품 애용 차원의 물산장려운동은 이것을 뒷받침해야 할 민족 산업과 생산력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물가만 올라 상인이나 자본가만 이익을 얻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 박영효, 유성준 같은 친일파를 참여시키는 등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일제와 타협하면서 이상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떨어져 나오고, 민중도 외면하여 이 운동은 결국 1년도 못되어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ㄷ. 민족 유일당 운동
 민족주의 분화 :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친일파를 육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켰습니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대립하였습니다.
 타협적 민족주의는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경제적으로는 실력을 기르고 사상적으로 민족성을 개조하고 정치적으로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1920년대 중반 자치론자들이 주장한 '조선 자치'란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조선에 의회와 같은 기구를 두는 등의 자치권을 일부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대표 인물로는 호남 지방의 대지주이자 경성방직의 자본가인 김성수 일가의 동아일보 계열과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앞장섰습니다. 동아일보계와 천도교 신파 등은 자치 운동을 지지하고 이를 추진해 갈 목적으로 연정회 결성을 추진하였습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는 자치운동에 대해 조선일보 계열을 중심으로 하는 신석우, 안재홍, 이상재와 천도교 구파 권동진은 이를 '관제적 타협 운동'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사정연구회(1925. 9)가 결성되어 민족 협동 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를 더해 갔습니다.

 민족 유일당 운동 :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려 하였습니다.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타협적 민족운동은 절대 배척하고, 혁명적 민족 운동과는 협동을 기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1925년 일제의 치안유지법 실시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어려워졌습니다. 또 정우회는 제3차 조선 공산당의 표면 단체로 1926년 11월 비타협 민족주의와 협동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ㄹ. 신간회와 근우회
 * 신간회 : 신간회는 자치론의 확산을 우려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협동전선으로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신석우, 안재홍, 홍명희, 문일평 등 조선일보 계열의 민족주의자와 이갑성, 이승훈 등 기독교계, 권동진 등 천도교 구파, 한용운 등 불교인 그리고 공산당의 한위건 등 28명의 발기에 의해 결성되었습니다. 이상재를 회장으로,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하여 비타협을 원칙으로 민족의 반일 역량이 총집결한 항일단체였습니다. 단체 가입이 아닌 개인 가입을 본위로 조직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군 단위에 지회를 두었습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에 지회 100개를 돌파했고, 1931년 5월에는 141개 지회에 회원수가 4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에 신간회 도쿄 지회, 오사카 지회 등을 조직하고 만주에도 지회 설립이 시도되었습니다.
 민족주의 세력이 우세한 중앙 본부는 합법적 활동과 모호한 강령 때문에 구체적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이 우세했던 지회는 각 지방의 노동, 농민 운동 등 크고 작은 사건에 개입하여 일제에 맞섰습니다. 수재민 구호 운동, 재만 동포 옹호 운동 등 사회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노동쟁의와 소작쟁의, 동맹 휴학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지원, 갑산 화전민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어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타협적 정치 운동 배격(기회주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와 생활 개선, 사상 연구의 자유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929년에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민중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습니다. 일제가 민중 대회 개최 8시간 전에 허헌, 홍명희 등 신간회 간부 44명을 검거하여 대회를 무산시켜 버렸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강력한 탄압은 신간회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신간회는 민중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김병로를 집행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집행부에서는 신간회의 비타협적 투쟁 노선을 비판하고 타협 노선을 옹호하였습니다. 자치 운동을 주장하는 천도교 신파와 관련을 맺으며 자치론자들과의 제휴를 주장했습니다. 신간회의 새 집행부가 이처럼 우경화 경향을 보이자 각 지회가 반발하여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해소론자들은 해소 운동을 통해 신간회 안에 구성되어 있는 노동자, 농민들을 노동 조합과 농민 조합으로 다시 편성하여 민중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는 협동 투쟁 기관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족주의자(안재홍)와 일부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해소 반대론자들은 신간회가 결집시키고 있는 대중적 역량을 분산시키지 않고 신간회 이상의 진보적 조직이 출현하기까지 해소해서는 안 된다고 맞섰습니다. 신간회 해소 문제는 1931년 5월 창립 대회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전체 대회에서 일본 경찰이 찬반 토의를 금지시킨 가운데 투표에 붙여져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안이 가결되었습니다.

 근우회(1927) : 신간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는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으로 조직되었습니다. 근우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야학 설치, 기관지 근우 발간 등을 통한 여성 계몽 활동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1931년에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근우회도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ㅁ. 항일 시위
 * 6.10 만세운동 :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에서 이미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이 다시금 전개한 독립 운동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밑바탕에는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었습니다.
 6.10 만세운동은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의 학생, 그리고 사회주의계에 의해 각각 추진되었습니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세력 등이 거사를 앞두고 발각됨으로써 당초 계획대로 만세 시위가 크게 번져 나가지 못했습니다. 순종의 인산 당일, 일제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행사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은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대규모 군중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6월 10일 당일에 끝난 것이 아니라, 각급 학교에 연쇄 반응을 일으켜갔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 투옥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했지만 그 뒤 학생 운동은 더욱 조직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6.10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을 통해 진행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일부의 결합 경험은 이후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 광주학생 항일운동 : 6.10 만세운동 직후부터 경향 각지의 각급 학교에는 크고 작은 항일 결사가 조직되어 식민지 교육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 등의 방법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의 활동은 국민들의 자각을 높여 주었습니다.
 1차 시위는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 간의 통학 열차에서 일본 남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11월 3일 한일 학생 간에 충돌과 제1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2차 시위는 일본 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 학생들만 검거, 탄압하면서 11월 12일 제2차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투쟁본부를 설치하고 신간회, 근우회 등 주요 단체들과 연계를 맺으며 광주의 투쟁을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위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면서 신간회 중앙본부와 서울의 학생 운동 조직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였고, 12월부터는 서울의 각급 학교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학생 시위의 배후 세력을 지목하여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는 한편 조기 방학을 단행하며 학생들의 시위를 봉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 1월 개학과 더불어 학생 시위는 다시 재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2) 국외 민족 운동
 ㄱ. 대한민국 임시정부 :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국민 국가 건설을 효과적으로 준비할 정부를 수입하고자 하였습니다. 3월 21일 연해주에서는 손병희를 대통령,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었습니다.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이동녕을 의정원 의장으로 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였습니다. 4월 23일 국내에서는 13도 국민 대표 명의로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서울에는 손병희를 정도령으로 하고, 이승만을 부도령으로 하는 조선민국 임시정부, 철산 의주 지역에서는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하고, 이승만을 국방총리로 하는 신한민국 정부 등이 있었으나, 이 정부들은 실제적인 정부 부서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 개의 정부가 각지에 수립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이들을 통합하여 단일 정부를 수립하고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독립전쟁론을 주장하는 측은 임정을 국내와 가깝고 동포 사회가 발달한 간도나 연해주에 둘 것을 주장했으나 외교론을 주장하는 측은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하이에 둘 것을 주장했습니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여 상하이에 통합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한성정부의 법통과 인맥을 계승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정부를 흡수하여 입법 기관을 형성한 후 정부를 조직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새로 헌법을 만들고(9.11), 내각과 의정원을 구성하여 형성된 단일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11.9)입니다. 내각은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임되었는데, 이는 한성정부안에 그대로 따른 것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3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으로서,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 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1919년 11월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중시한 이동휘 등 한인 사회당 계열이 참여함으로써 임정은 민족주의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정부로 새롭게 출범했습니다.

 초기의 임시정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외교는 파리강화회의나 워싱턴회의(1921.11), 국제연맹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1차 목표를 두었으나 그것은 모두 좌절되었습니다. 미국의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이승만), 필라델피아에 한국 통신부(서재필), 파리에 파리 위원부(김규식) 등을 두어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조직망인 연통제와 교통국은 독립 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의 업무를 관장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군자금을 애국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하였습니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습니다. 상하이에 육군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 전쟁을 수행할 초급 지휘관 양성에 노력하였습니다. 또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독립군을 임시 정부 직할의 군대로 개편하려고 하였습니다.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독립군을 임시 정부 직할의 군대로 개편하려고 하였기에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육군 주만 참의부 등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함으로써 안으로는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밖으로는 한국의 자주성과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인식시켰습니다.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적극적인 무장 투쟁 노선을 주장하면서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였습니다. 신채호 등의 주장으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 운동의 상황을 점검하고, 장차의 진로를 모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각 지방의 70여 개 단체 대표가 모여 의장 김동삼, 부의장 윤해와 안창호로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임시정부의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완전 해체 후 새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 지금대로 유지하자는 현상 유지파가 엇갈려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개조파가 대회에서 탈퇴한 가운데 창조파가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고 연해주로 갔으나 새 정부는 좌절,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국민대표회의는 분열된 독립 운동계의 통일을 목적으로 했으나 좌절되었고 오히려 이 회의에 참여한 세력 간에, 그리고 임정의 현상 유지를 고집한 정부 옹호파 사이에 불신과 분열을 가중시켰습니다.

 현상 유지파는 이승만을 해임하고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 후 2차 개헌을 단행하여(1925)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습니다. 초대 국무령에는 만주 독립 운동계의 중심 인물인 이상룡이 추대되어 6개월 동안 임시정부의 혼란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각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후 국무령이 된 김구는 3차 개헌(1927)을 단행하였습니다. 주석이 국무위원의 합의에 의해 정부를 운영하는 집단 지도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ㄴ. 독립군의 항일 전쟁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습니다. 이 시기 30여 개의 독립군 붇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북간도 지역의 대한국민회군, 북로군정서군, 대한독립군 등의 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주요 전투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된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이범석의 북로군정서가 여러 독립군 단체와 연합하여 이끌어 낸 청산리 대첩이 있습니다. 독립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습니다. 국내에 침공한 부대들이 전과를 올린 후 만주 지방으로 철수하면 이를 추격하는 일본군이 국경을 넘었다가 독립군의 반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봉오동 전투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아무의 국민회독립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은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포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훈춘의 민가와 일본 영사관 분관을 습격하여,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습니다. 이것을 구실로 일본군의 간도 침입이 이루어졌습니다.

 * 청산리 전투 : 일본군은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와 관동 지방에 주둔 중인 부대 및 시베리아에 출병 중인 부대를 동원하여 세 방향에서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여 왔습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전후 일주일 동안 화룡현 이동구, 삼도구 일대에서 일본군 주력 부대를 맞아 북로군정서군, 대한독립군, 국민회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의 연합 부대가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등지에서 벌인 대소 10여 회의 전투에서 거둔 승첩이었습니다.

 * 간도 참변 : 일본군은 간도 참변(경신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초 서북간도를 침입한 일제의 대병력은 독립군의 모체인 한인 사회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병행하여 한인 대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이같은 일본군의 만행은 청산리에서 대참패를 당한 후부터 그에 대한 보복으로 더욱 극렬해졌습니다. 독립군은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 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은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김좌진, 홍범도, 총사령에 김규식, 여단장에 이청천을 간부진으로 하였습니다.

 * 자유시 참변과 3부 설립 : 대한독립군단은 자유시로 도랑가 소련의 적군과 연합하여 전선을 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독립군 부대들 간의 내부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소련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교섭을 시도했는데, 여기세서 일본은 소련 영토 내에서 일제에 불만을 품고 있는 한국인의 행동을 억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소련 적군은 대한 독립군단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일부는 적군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만주 지방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남만주의 집안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유역에서는 임시정부 직속의 참의부가 결성된 후 길림성과 봉천성 일대에는 오동진과 지청천을 중심으로 정의부가, 북만주에서는 연해주에서 돌아온 독립군들이 김좌진을 중심으로 신민부를 각각 조직하였습니다. 3부는 입법, 사법, 행정 기관을 갖춘 일종의 자치 정부로서 민정과 군정을 겸하면서 동포들을 관할하였습니다. 동포들의 자치 행정을 맡아 보는 민주적 민정 기관을 두고 입헌 정치 조직까지 갖추었으며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맡는 군정 기관도 설치하였습니다. 자체의 무장 독립군도 편성하여 한, 만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습니다.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해 맺어진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 협정은 일제와 만주 군벌이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민족 유일당 운동 : 만주 지방에서는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서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를 비롯한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었습니다. 촉성회 측은 신민부와 정의부의 일부, 신민부 군저아가 중심이 되어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 일면 혁신의회를 만들어(1928) 국민부 측과 양립했습니다. 또 협의회의 중심 세력인 정의부는 신민부 민정파와 참의부의 일부 세력을 합쳐 국민부를 조직하면서(1929) 정의, 신민, 참의 3부는 해체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가서 혁신의회 계통은 김좌진 중심의 한족총연합회를 구성했으나 그가 암살된 후에는 홍진, 이청천 등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했습니다.(1930) 그 군사 조직인 한국독립군이 북만주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1933년경 중국 관내로 옮겨갔습니다. 국민부 계통은 현정경, 현익철을 중심으로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1929) 남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했습니다.

 ㄷ. 애국지사들의 항일 의거 :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본인 고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였습니다.
 * 의열단(1919.11) : 의열단은 만주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중국으로 이동하여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 암살 등의 의열 투쟁에 힘을 쏟았습니다. 주로 총독부의 고위 관료, 군부 수뇌, 매국노, 친일파 등을 암살하였습니다. 그 밖에도1921년 김익상은 조선 총독부에, 1923년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 나석주는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또 북경에서 신채호를 만나면서 의열단은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이론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여(1923) 의열단의 활동을 북돋았습니다.

 * 한인애국단(1931)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없애고, 독립운동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기 위해 일제에 대한 파괴와 암살을 계획하였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특무대의 설치와 암살 파괴 공작의 계획과 실행은 임시정부 재무부장 김구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였고, 그가 새 특무 조직을 한인애국단으로 하였습니다.
 1932년 이봉창이 도쿄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행차에 폭탄을 던진 것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민족에서는 희망을 주고 일제에서는 두려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중국 신문들이 일제히 이 거사를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함'으로 보도하자, 상해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은 이를 핑계 삼아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 폭격하였습니다.
 침략 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상하이 흥커우 공원에서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자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을 보내어 식장을 폭파하게 하였습니다. 1932년 윤봉길은 폭탄을 던져 단상에 있던 일본군 장성과 고관들을 살상하였습니다. 윤봉길 의거는 국제적으로 큰 관심사가 되어 한국독립운동의 의기를 드높였으며, 특히 한국의 독립 운동에 냉담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1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내었다고 감탄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습니다. 이것이 게기가 되어 중국 정부가 중국 영토 내에서 우리 민족의 무장 독립 활동을 승인함으로써 한국 광복군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1930~1940년대 민족 운동
 1) 1930년대
 ㄱ. 만주지역
 한중 연합 작전 :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난구을 타개하려 하였습니다. 지청천이 인솔하는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호로군과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고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에서 일만 연합 부대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특히 대전자령 전투에서는 4시간의 격전 끝에 승리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였습니다.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혁명군도 중국의용군과 연합해서 흥경성 전투,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한중 연합 작전은 그 후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 중국군의 사기 저하, 한중 양 군의 의견 대립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였습니다. 또 임시정부가 직할 군단 편성을 위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의 이동을 요청하자, 대부분의 독립군은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습니다.

 동북항일연군 : 중국공산당은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의 강화를 목적으로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했습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다수를 차지하던 조선인을 반일 민족통일전선에 적극 끌어들이려고 조선인의 독자적인 무장 부대 조직과 항일투쟁을 지시했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은 한인을 대상으로 조국광복회라는 대중 조직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오성륜, 엄수명, 이상준이 중심이 된 이 단체는 10대 강령을 발표하여 모든 계급이 일치단결하여 조국을 광복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1937년 6월 동북 항일 연군 제2군 6사(사장 김일성...) 대원 80여 명은 국내 조직원과 함께 보천보를 점령하고 경찰주재소 등을 불태우고 돌아갔습니다. 이 전투로 동북항일연군 내 조선인 부대의 활동이 국내에 알려져 민중을 고무하는 한편,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의 보천보 습격에 놀란 일제는 이들을 토벌하는 데 힘을 기울여 1937년 10월 이래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원 739명을 검거했습니다. 이어서 일제는 193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대대적인 동계 토벌을 단행하여 만주 일대의 항일 유격 부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일본군의 대토벌로 동북항일연군은 소부대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1941년 무렵 소련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군사 훈련과 정치 교육을 받으면서 일제의 패망을 기다렸습니다. 이들 가운데 조선인 부대는 해방 뒤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ㄴ. 중국 : 만주 사변과 상하이 사변에 의한 중국인의 대일 항전 의식 고조, 윤봉길 의거로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전환과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미국과 일본, 혹은 소련과 일본 사이의 전쟁 예견 등이 작용하였습니다.
 우파 계열의 한국독립당(이동녕, 안창호, 김두봉), 한국동지회(김규식)와 좌파 계열의 조선의열단(김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등은 민족 유일당 결성을 제창하였습니다. 임시정부를 고수하려는 일부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결집하여 만든 단일 정당인 민족혁명당은 주석은 김규식, 총서기는 김원봉이었습니다. 당 운영의 주도권 문제로 이후 각 정파 간에 내분이 일어나 조소앙의 한국독립당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이 이탈하면서 민족혁명당은 통일전선당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었습니다. 민족혁명당은 조소앙, 이청천, 최동오 등이 탈락하자 김원봉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되었습니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 중인 전쟁이 일어나자 임정은 민족 우익 전선의 통일에 나섰습니다. 그해 8월 김구의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소앙, 지청천 등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습니다.
 조선민족전선연맹 : 조선민족혁명당은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규광, 김창숙), 조선청년전위동맹(최창익),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단체와 연결하여 한구에서 조선민족전선동맹을 결성하여 관내 민족 좌익 전선을 통일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확실한 보장,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적의 일체 재산 몰수, 근로대중의 생활 개선, 남녀평등 등을 채택했습니다. 일제 타도와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자신의 군사 조직으로 조선의용대(1938)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연합진선협회 : 좌익적 세력의 통일 전선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우익 통일 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통일시키려는 운동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 두 단체를 통일한 전국연합진선협회가 성립되었습니다. 민족전선연맹에 참가한 4개 단체와 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참가한 3개 단체가 한국혁명운동 통일 7단계 회의를 개최했으나 임시정부 존부 1문제, 조선의용대 지휘권 문제 등에 의견이 갈라져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 1940년대
 ㄱ. 중경 임정
 한국독립당과 4차 개헌 :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3당은 임시정부의 옹호 유지를 전제로 통합을 추진하여 새로운 한국 독립당을 창당했습니다. 삼균주의 원리에 따라 보통 선거제에 의한 정치 균등, 토지와 대기업 국유화를 통한 경제 균등, 국비 의무교육제에 의한 교육 균등의 실시를 정강 정책으로 채택했습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일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지도 체제를 강화하여 헌법 개정을 통해 국무위원제(집단 지도 체제)를 주석 중심제로 바꾸어 행정, 군사를 총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주석 김구의 영도력이 강화된 가운데 임시정부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건국 강령(1941) : 일제의 패망에 대비해 삼균주의에 기초하여 건국강령을 발표했습니다. 보통선거의 실시, 국비 의무교육의 실시, 토지의 국유화와 농민 분배, 대규모 생산 기관의 국유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습니다.

 좌익 합류(1942. 10) : 태평양 전쟁의 발발 이후 조선민족 전선연맹 측의 김원봉, 김규식, 유자명 등이 임정에 참여하였습니다. 김원봉, 유자명 등이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5차 개헌(1944. 4) : 주석은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신설된 부주석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군무부장에는 김원봉이 선출된 것을 비롯하여 좌익 진영의 인사들이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것입니다. 이로써 임시 정부는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좌우 연합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 한국광복군 :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각처에서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이청천을 총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즉각 대외 활동을 펴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켰습니다. 그 후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조선의용대(1942. 5) :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군사 면에서도 좌우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군사협정(1943) : 영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인도, 미얀마 전선에 9명의 광복군 공작대가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은 대적 선전 방송, 포로 심문, 삐라 제작 등에 종사했습니다.
 국내 진입 작전 계획 : 조국의 광복을 우리의 손으로 쟁취하기 위하여 직접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임정은 중국 주둔 미군의 전략 첩보기구인 OSS와의 합작으로 광복군의 제2지대와 제3지대를 국내에 투입할 유격요원으로 훈련시켰습니다.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여 특수 훈련을 실시하였고, 비행대까지 편성을 꾀하였습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국광복군은 그 해 9월에 실행하려고 준비 중이던 국내 진입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습니다.

 ㄴ. 화북 지역 : 조선의용대에서 분화된 화북 지방의 조선독립동맹 계열은 조선의용군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 조선독립동맹(1942. 7) : 화북청년연합회는 항일 민족통일전선체로서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는 화북조선독립동맹(독립동맹)으로 해체되었습니다. 보통 선거의 실시, 의무교육 실시, 조선에 있는 일제의 대기업의 국영화와 토지의 분배 실시 등을 내걸었습니다.

 * 조선의용군 : 중국 공산군 8로군과 협동 작전을 펼치며 대일전에 참가했습니다. 조선의용군은 8로군과 일본군 40만 명이 싸운 호가장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는 한편, 대적 선전, 후방 공작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뒤 조선 의용군은 중국의 국공 내전에 참여했다가 상당수가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들은 모택동과 함께 연안 지방에 본거룰 두었기 때문에 속칭 연안파라고도 불립니다.

 ㄷ. 국내
 일장기 말소 사건(1936) : 조선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를 보도하면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삭제한 채 보도하였습니다. 이 일장기 삭제 사건은 당시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침묵을 강요당한 언론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에 처해졌고, 사장 송진우와 주필 김준연 등 간부들이 사임하였습니다. 조선 중앙일보는 무기정간되고 재정난까지 겹쳐 영구히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조선건국동맹(1944. 9. 10) : 일제 패망에 대한 대비 등을 고려하여 조직된 조선건국동맹은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며 좌우익 구분 없이 참여했습니다. 건국동맹은 10개 도에 책임자를 두어 지방 조직을 갖추는 한편, 경기도 용문산에서 농민 동맹을 만들어 식량 공출, 군수물자 수송, 징용, 징병을 방해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또 공산주의자 협의회와 함께 군사위원회를 만들어 국내 무장 봉기와 철도 파괴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 밖의 항일 무장 세력이 국내 진공을 감행하면 이에 호응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워 건국 동맹원을 연안의 독립 동맹에 파견했습니다. 건국동맹의 계획은 일제가 생각보다 빨리 패망함으로써 실현되지 못했지만 건국동맹의 기반은 해방 직후 건국독립위원회를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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