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한민국의 성립


 1. 미,소 군대의 진주
 1) 연합국의 회담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의 패배가 분명해짐에 따라서 연합국 측은 전후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ㄱ. 카이로 회담(1943.11) :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미(루스벨트), 영(처칠), 중(장제스)은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주 내용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과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탈취, 점령, 도취한 모든 지역은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관해서는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고 하였습니다.

 ㄴ. 얄타 회담(1945.2) : 미(루스벨트), 영(처칠), 소(스탈린)는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주 내용은 비밀 회담으로서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 문제와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미, 소, 중 3개국 대표 1명씩으로 된 신탁 통치를 거론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20~30년간의 신탁 통치가 필요하다 했고, 소련 수상 스탈린은 그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의견이었습니다.

 ㄷ. 포츠담 선언(1945.7.17) : 독일이 항복하자(1945.5.7) 연합국은 다시 포츠담에서 회담하여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한편, "카이로 선언의 조항들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훗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고 밝혀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습니다.

 2) 건국준비위원회 : 조선 총독부 측으로부터 행정권 이양 교섭을 받은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 3개월간의 식량 확보, 조선인의 정치 활동 및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의 조직 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확약을 받고, 곧 건국 동맹을 모체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안재홍과 국내 공산주의자를 포함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는 통일 전선적인 성격을 띤 당시 국내 최초의 정치 단체였습니다. 송진우 계열의 일부 우익 세력이 불참했습니다.
 발족 초기의 건국 준비 위원회는 당면 목표를 치안의 확보, 건국 사업을 위한 민족 역량의 일원회, 교통, 통신, 금융 대책 및 식량 대책 등에 두었습니다. 치안을 유지하려고 지역과 직장별로 건국 치안대를 조직하고,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지방에도 지부 조직을 확대하여 8월 말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를 결성했습니다. 지방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치안 유지와 물자 확보 등 실질적인 지방 행정 기관의 역할을 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9월 6일에 1300명의 인민대표자들이 모인 전국인민 대표자대회를 열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이라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우파의 탈퇴로 대표성이 약해진 조선인민공화국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에 망명해 있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온건 좌파인 허헌을 각각 추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실권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이 장악하여 실제로는 좌익 정부나 다름없었습니다.
 중앙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지방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는 지방인민위원회로 바뀌어 갔습니다. 10월 말까지 남한 8도와 13개 도시, 132개 군에 지방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지방인민위원회는 조직부, 선전부, 치안대, 식량부, 재정부 등을 두고 치안 유지와 일제가 남기고 간 재산 관리에 힘썼습니다.

 3) 미, 소 군정 : 소련이 먼저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하자,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북위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자고 제안했고(일반명령 1호), 소련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38선을 경계로 미소군의 남북한 분할 점령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에는 소련의 군정이, 남한에는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었습니다.
 ㄱ. 소련 군정 : 8월 26일 평양에 총사령부를 설치한 데 이어, 6개 도, 85개 군, 7개 시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하였습니다. 38도선 이북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행정권을 이양 받은 소련군은 일본의 군인, 경찰관, 행정관을 억류하는 한편, 친일 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 또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도마다 결성하여 행정권을 이양했습니다.
 1945년 11월 19일 도, 군, 면 차원의 지방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통합하고 조정하고자 북조선 행정 10국을 만들었습니다. 행정 10국은 각 도 사이의 경제와 문화 활동, 보안 사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ㄴ. 미군정 :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의 명의로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체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 시행된다."고 포고하고 바로 군정을 실시했습니다. 미국군은 건국준비위원회가 급히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주권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정은 조선 총독부의 행정 기구와 그 조선인 관리를 그대로 인계받아 운영했습니다. 경제 정책으로는 우선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토지를 미군정이 접수하여 이를 관리할 신한공사라는 기구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귀속 재산의 일부를 개인에게 불하하였습니다. 또 미군정은 소작료가 총 수확률의 3분의 1을 넘을 수 없도록 법령을 정하는 한편 생필품의 매점매석으로 인한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하여 생필품의 유통을 통제하는 정책을 썼으나 경제 질서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였습니다.

 4) 정치 단체
 ㄱ. 남한
 한국 민주당 : 한국 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에의 참여를 끝까지 거부한 송진우 계열이 그 핵심이 되어 결성한 단체입니다. 기본적으로 지주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하였습니다.

 독립촉성 중앙협의회 : 이승만이 귀국 후에 조직한 단체로, 한국 민주당, 국민당, 조선 공산당을 비롯한 각 정당 및 단체 2백여 개가 모여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친일파, 민족반역자 제거를 둘러싸고 갈등이 확대되면서 조선공산당이 탈퇴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 :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가 결성한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세워 여러 정파를 통합하려 하였습니다.

 국민당 : 안재홍이 주도한 중도 우파의 국민당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정치 이념을 내세워 좌우 이념을 통합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인민당 : 중도 좌파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앞장서 결성하였으나 주도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자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였습니다.

 남조선신민당 : 백남운을 중심으로 한 중도 좌파 세력이 결집한 것입니다. 백남운은 유산계급 일부의 혁명성을 인정하고 무산계급이 이들과 연합하여야 한다는 '연합성신민주주의론'을 내놓았습니다.

 조선공산당 : 박현영의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습니다.

 ㄴ. 북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 1945년 10월 조직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고 형식적으로는 중앙당의 지부였으나, 소군정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사실상 독자적으로 혁명을 진행했습니다.

 조선 민주당 : 북한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은 소련의 초기 좌우 연합 정책에 따라서 조선 민주당을 결성(1945.11)했습니다. 조선 민주당은 서북 지방의 민족 자본가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었습니다.

 북조선 신민당 : 소련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고 뒤늦게 귀국한 김두봉은 북조선 신민당(1946.2)를 결성했습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1946.2.8) :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지역 인민위원회 대표가 모여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북한의 임시 중앙 권력 기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이 선출되었습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일제 잔재의 청산, 중요 산업의 국유화, 토지 개혁의 실시, 8시간 노동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0개조 정강을 발표하고 북조선을 강력한 혁명적 민주기지로 만들 목적으로 일련의 '민주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원칙으로 20일 남짓한 짧은 기간에 토지 개혁을 완료했습니다. 농가 호수 가운데 4%의 지주들이 총 경지 면적의 58%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토지 개혁의 결과 총 경지 면적의 52%, 지주 소유의 토지 약 80%가 몰수당하여 식민지 지주제가 청산되었습니다.


 2. 좌, 우 대립
 1)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ㄱ. 내용 및 영향 : 1945년 12월 미, 영, 소 3국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임시민주정부의 수립,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 공동위원회와 임시정부는 최고 5년 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습니다. 3상 회의 결정이 국내에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익 정치 세력이 모두 반대했습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은 반탁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임정은 반탁운동을 임정법통론에 입각한 정부수립운동으로 연결시켰습니다. 또 한국민주당의 기관지로 일컬어지던 동아일보는 대대적인 선전작업을 통해 반탁운동을 확신시켰습니다.
 여기서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진영은 곧 "3상 회의 결정의 총체적 지지"를 통해 찬탁 노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우익은 반탁 운동을 '반소 반공'으로 몰아갔고, 친일 세력은 반탁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애국자로 둔갑했습니다.

 ㄴ. 좌우 대립 : 남한 정국은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비상국민회의와 모스크바 결정안을 지지하는 민전이 대립하는 극심한 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임정은 비상국민회의(1946.2.1)를 중심으로 민족해방운동 시기 임정의 법통 계승을 내세우면서 반탁 운동을 벌여 나갔습니다.
 이승만계의 대한독립 촉성중앙협의회는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와 합쳐 대한독립 촉성국민회로 개편되었습니다. 이들 두 계통이 미군정의 미소공동위원회 대비책과 연결되어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구성하여 우익 세력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은 비상국민회의에 맞서 민주주의 민족전선(1946.2.19)을 결성했습니다.

 2)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
 ㄱ. 1차 미소공동위원회 :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체적인 사업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조선의 정당, 사회단체와의 협의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참여 아래에서 4개국 신탁통치협약 작성 등이었습니다.
 1946년 3월 20일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미소 두 나라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협의 대상에 참여할 단체의 자격 문제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였습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안에 반대하는 정당, 사회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은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참가를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이러한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하여 결국 결렬되었습니다.

 ㄴ. 이승만의 정읍 발언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이승만은 이른바 정읍 발언을 통해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고 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제기했고, 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ㄷ. 좌우 합작 운동 : 중도 좌, 우파인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었습니다. 좌우 합작 운동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급속히 추진되었습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좌우 합작에 대한 지지 성명은 좌우 합작을 위한 시도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단독 정부 수립과 관련된 발언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었던 이승만이 합작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아놀드 군정장관의 지지, 한국독립당의 지지가 이어지면서, 민전에서도 좌우 합작이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전제 위에서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김규식과 안재홍을 대표로 하는 5명의 우익과 여운형 등을 대표하는 5명의 좌익 인사들은 1946년 7월 하순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좌우합작 7원칙은 우파와 좌파 간에 이견이 심했던 토지 문제와 친일파 처리 문제 등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조정된 것이 주목됩니다.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가장 반대한 측은 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이었고, 우익 쪽의 김구계 한국독립당은 찬성했습니다. 당시의 여론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습니다.

 ㄹ. 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5) : 미국은 미, 영, 소, 중 4개국 회의를 요구하면서 보통선거에 의한 남북 각각의 입법기관 설치를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들로 구성되는 통일 임시정부가 미, 소 양군 철수 문제와 완전한 독립 국가 수립 문제를 4개국과 협의하게 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4개구 회의로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며, 남북 별개의 임시 입법회의를 구성하는 것은 남북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라 하여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반도 문제를 미국 추종 세력이 절대 우세한 유엔에 이관했습니다. 이로써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1) 유엔총회와 남북 협상
 ㄱ. 유엔총회 :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한 미국은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참여 대상 문제로 결렬되자 그해 9월 17일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으로써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방향으로 한반도 정책을 바꾸었습니다. 한편 소련은 조선 문제를 유엔에 제의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소련 대표는 조선 문제는 소련, 미국, 영국 3국 사이에 협정에 의해서만 해결되어야 하며, 최선의 해결책은 미소 양군이 철퇴한 후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의 장래 문제를 해결토록 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제1차 유엔총회(1947.11.14)에서 유엔은 총회에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9개국으로 구성되었으나  우크라이나가 참석을 거부함에 따라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측은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습니다.
 유엔 위원단의 입북이 거절되자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소총회에서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ㄴ. 단독 정부 반대 : 김구의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1947.12.20), 남로당 등은 단독 선거가 민족을 분열시킨다며 반대했습니다. 남로당은 1948년 2월 7일 유엔 한위가 입국하자 단선 단정 반대, 미소 양국의 군대 철수 등을 요구하며 이른바 2.7 투쟁을 벌여 나갔습니다. 2.7 투쟁 뒤에도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 4월 3일 새벽 봉화를 신호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미군 즉시 철수, 단독 선거 반대, 투옥 중인 애국자 석방 등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제주도 4.3 사건이라고 합니다.

 한편 김구와 김규식은 한국 문제의 국제연합 이관을 반대하고,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습니다. 1948년 4월 하순, 드디어 10일 간에 걸친 남북지도자회의가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남북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남북 요인 회담 결과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습니다. 이후 김구와 김규식은 5.10 선거에 불참하고, 1948년 7월 21일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2) 분단 정부
 ㄱ. 대한민국 정부 수립
 5.10 총선거 : 1948년 5월 10일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등 우익이 주로 참여한 가운데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서구식 보통선거로서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좌익과 중도 세력 그리고 일부 우익 세력이 선거를 거부했고, 당시 등록된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 425개 가운데 43개만이 선거에 참여했습니다. 선거 결과 제헌 국회는 무소속이 85석,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가 54석, 한민당이 29석, 대동청년당이 12석, 민족청년당이 6석을 차지했습니다. 5.10 선거에 참여한 한민당은 내각 조직 과정에서 야당으로 밀려났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 국회에서 의장은 이승만, 부의장은 신익희였습니다. 1948년 7월 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였습니다. 7월 17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정부 조직은 대통령 중심제를 골간으로 하되,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내각제 요소를 담고 있었습니다.
 7월 20일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이승만과 부통령에 이시영을, 국회의장에 신익희, 국무총리에 이범석을 각각 선출하여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의 유일한 정부로 승인하고, 그 후 소련과 그 동맹 국가들을 제외한 미국 및 자유 진영 50여 개국의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습니다.

 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1946년 북조선 공산당과, 연안파의 김두봉이 주축이 된 북조선 신민당을 통합하여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고 행정 기관으로 '북조선 인민위원회'(1947.2)를 수립하고, 인민군을 창설하였습니다. 북한은 8월 25일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9월 8일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소련은 1948년 10월에 북한 정권을 수립한 후 12월에 군대를 철수하였습니다. 1949년 6월에는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이 되어 남한 좌익의 대부분이 북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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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문화 운동


 1. 국학 운동
 1) 국어 연구
 ㄱ. 조선어 연구회(1921) : 3.1 운동 이후 한말의 국문연구소의 후신으로 임경재, 장지영, 김윤경 등의 주도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습니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습니다.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습니다.

 ㄴ. 조선어학회(1931) :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한글 교육에 힘써 한글 교재를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회원들이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한글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대중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동아일보 등 신문사와 제휴하여 전국적으로 조선어강습회를 열었습니다.(1931) 또 중단된 한글 잡지를 조선어학회가 같은 이름으로 계승하여 일본의 탄압으로 강제 폐간당한 1942년까지 93호를 발간하면서 국어의 학술적 연구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습니다. 훈민정음 언해본(1932),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 등을 발간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펀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2) 국사 연구
 ㄱ. 일본의 식민 사관
 타율성론 :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과 한반도 지역의 독립된 역사성 및 문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그 요지는 한반도 지역의 역사가 그 주민의 자발적 활동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중국, 만주, 일본 등 주변 민족의 자극과 지배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종류로는 임나일본부설, 만선사관론, 반도적 성격론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정체성론 : 정체성론은 주로 어용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이들은 20세기 초 한국의 경제 조긱과 경제 단위가 일본 10세기 초인 고대 말기에 해당할 정도의 후진 사회였다는 주장입니다.

 당파성론 :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을 지적한 것으로, 한마디로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를 당쟁이라 표현하고 그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일선동조론 :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하나다." 라는 이른바 일선동조론은 일본서기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아버지라는 스사노 오노미코토가 신라에 강림하여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인과 한국인은 같은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일 병합'은 당연하다는 주장입니다.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일선동조론을 내세워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강제 징용과 강제 징병 등 일제의 침략 전쟁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데 적극 이용했습니다.

 ㄴ. 연구 방법 :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사를 수호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론이 체계화되어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이 대두하였습니다.

 * 민족주의 사학 : 한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박은식 : 우리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일본의 침략 과정을 소개한 한국통사(1915)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소개한 한국 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신채호 : '낭가 사상'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습니다. 저서로는 꿈하늘(1916), 조선상고문화사를 저술하여 단군 조선의 문화와 정치사를 쓰고 대종교와 연결되는 전통적 민간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혁명 선언'에서는 지배층 위주의 유교적 사관인 사회진화론을 부정하고 민족적 민중에 의한 재발전을 강조하였습니다. 조선사연구초(1925)나 조선상고사(1931)에서는 사대적 유교 사관을 비판하고 민족 항생사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 고대사를 새로이 체계화시켰습니다.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에는 정인보, 안재홍 등이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정인보 : 조선사연구에 실린 '5천년 간 조선의 얼'이란 글에서, 역사의 본질을 '얼', 즉 민족 정신에서 찾는 '얼 사관'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의 척추인 얼의 반영이며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곧 이 얼의 줄기를 세우는 일이라 했습니다. 주요 활동으로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하였고, 광대토대왕릉비를 연구하여 일본인의 잘못된 고대사 연구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양명학과 우리 나라의 5천년의 얼을 정리하여 민족 정기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문일평 : 민족 의식,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일원적 정신을 제시하였고 조선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심의 결정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종과 실학자들의 민족 지향, 민중 지향, 실용 지향을 높이 평가하는 사론을 발표하여 일반 국민의 역사 의식을 계발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국제 관계에서 실리적 감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이런 시각에서 대미관계 50년사라는 명저를 내기도 하였는데, 그의 저술은 호암 전집(1939)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었습니다.

 * 사회 경제 사학 :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습니다.
 백남운 : 조선 사회 경제사(1933)와 조선 봉건사회 경제사(1937)를 지어 처음으로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세계의 제 민족과 같은 궤적에서 일원론의 변증법적 역사 발전 법칙에 의해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실증주의 사학 : 한국 학자들이 세운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사학도 발달하였습니다. 개별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순수 학술 활동을 목표로 실증적인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한국사를 연구한 학풍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순수 학문을 포장하면서 식민주의사학에 학문적 대응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진단학회(1934) : 일본인 학자들의 주도로 조직된 청구학회(1930)에 자극을 받아 진단학회를 조직하였고, '진단학보'라는 학회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병도, 이상백, 김상기 등의 역사 학자와 이윤재, 이희승 등 국어 학자, 송석하, 손진태 등 민속 학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독립 운동에 직접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문화사 연구의 지평을 열어 주었고, 역사학을 비롯한 국학 전반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 신민족주의 사학 : 문헌 고증을 토대로 하고 사회경제 사학을 수용한 바탕에서 민족 사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안재홍과 손진태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안재홍 : 극좌와 극우를 배격하고 만민공생의 통합된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를 계승, 발전시켜 고대 국가의 사회 발전 단계를 해명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해방 후 조선상고사감(1947)이라는 단행본을 엮어냈고, 우리나라의 전통철학을 정리하여 불함철학대전(1940)과 조선철학(1944)을 저술하였습니다.

 손진태 : 안재홍의 영향을 받아서 지배 계층 위주의 봉건적 사관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계급 사관을 비판하였으나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신민족주의 사관을 확립했습니다. 대내적인 사회 발전 논리와 대외적인 민족 성장 논리를 결합하되 "계급의 생명은 짧고 민족의 생명은 길다"고 하여 계급 투쟁보다는 민족 균등의 입장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역사 이론은 신채호의 이론을 발전시켜서 투쟁과 화합의 양면성을 추구했습니다. 저서로는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에서는 정치, 경제 형태와 민족 균등의 발전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 신라를 민족 결정기로 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손진태 등에 의한 민속학 연구도 활기를 띠었으며,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유출을 막는 데 힘썼습니다.

 3) 민족 교육과 과학 대중화 :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시도되었습니다.
 ㄱ. 민립대학설립운동 : 1920년대에는 조선여자교육회와 조선교육회가 창립되어 교육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을 통해 최고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도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ㄴ. 문맹퇴치운동 :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차별 교육 정책으로 인하여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문맹자가 증가하였습니다. 문맹자의 증가는 민족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바로 일제가 목표로 하였던 한국인의 우민화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3.1 운동을 계기로 문맹 퇴치가 급선무임을 자각하여 이를 실천에 옮겨 갔습니다.
 대한 제국 시기 이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개량 서당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20년대 이후에는 야학이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기관과는 달리, 우리 글과 말, 역사를 교육하여 항일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습니다. 일제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야학을 탄압하여 문을 닫게 하였고 '1면 1교주의' 시책을 강행하여 공립 보통학교를 증설하였으나 이에 수용된 한국 아동은 학령 아동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주 사변 이후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야학과 개량 서당 등 민족 교육 기관은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한글 보급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은 언론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문자보급운동 :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방학 중에 귀향하는 중등 이상의 남녀 학생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 문맹 퇴치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브나로드 운동 : 동아일보는 1931년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브나로드운동은 당시 2천만 국민 중 80%에 가까운 1600만 명이 문맹자라는 심각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 절약 등 생활 개선을 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어학회 : 언론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어학회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협조하였습니다. 문자보급운동에 사용될 교재를 만들었으며 대부분 사립 학교 교원으로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솔선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글 강습회를 열었습니다.
 운동이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산되자 조선 총독부의 탄압이 가혹해졌고, 결국에는 대규모의 순회 강습이나 문맹퇴치운동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져, 민족 교육 운동으로서의 문맹퇴치운동은 중단되었습니다.

 ㄷ. 과학대중화운동 : 일제의 교육 정책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낮은 수준의 실업 인력을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선진 근대 과학 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항공기는 과학 기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1922)은 우리 민족에게 큰 감명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비행술은 "우리도 하면 된다."라는 자신과 긍지를 온 민족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지와 잡지 등에서도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습니다.
 발명학회(1924) : 발명학회는 과학 종합 잡지인 과학 조선의 간행과 '과학의 날' 제정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과학 지식을 보급하였습니다. 과학 지식 보급회를 설립하여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으며, 과학 도서의 편찬과 간행, 강연회, 전시회 등의 개최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나, 1930년대 말 일제의 강요로 일제가 만든 과학 단체에 강제로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학 진흥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과학 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2. 문예 활동
 1) 종교 활동 :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종교 단체들은 다양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ㄱ. 천도교 : 3.1 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문화 운동을 표방한 민족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습니다. 개벽, 부인, 신여성, 학생, 어린이, 조선농민 등 많은 출판물을 발간하여 민중의 자각과 근대 문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제2의 독립선언운동을 계획하였고, 사회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문화 발달과 수호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ㄴ. 대종교 :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대종교는 일제의 심한 탄압을 피해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과 북로군정서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일제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미쓰야 협정을 맺으면서 대종교의 불법화를 관철시켰습니다.

 ㄷ. 기독교 : 기독교는 천도교와 함께 3.1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3.1 운동의 지방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많은 신자가 투옥되거나 학교가 폐쇄되기도 하였습니다.

 ㄹ. 천주교 : 개화기 이래 전개해 온 고아원, 양로원의 설립 등 사회 사업을 계속 확대시켜가면서 경향 등의 잡지를 통해 민중 계몽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일부 신자는 만주에서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습니다.

 ㅁ. 불교 : 사찰령(1911)으로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나누고 본사의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총독에게 주지 임명과 사찰 재산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한 악법이었습니다. 한용운 등은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통합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에 과감히 맞서서 민족 종교의 자세를 견지하였습니다.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여 한용운의 조선 불교 유신회(1921)를 중심으로 불교계 정화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 불교 유신회는 사찰령의 폐지와 천일주지 성토운동을 벌였으며, 근대적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ㅂ. 원불교(1916) :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현대화를 주장하면서 민족의 자립 정신 고취와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립 정신을 키워갔으며, 남녀 평등, 허례허식의 폐지 등 새생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ㅅ. 유교 : 일제는 한일 병합 이후 일제의 침략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유림 세력을 회유, 통제하기 위해 경학원 규정을 공포하고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전국의 향교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국외에 망명하거나 의병 투쟁과 무력 항쟁을 계속하는 한편 교육 사업과 계몽 운동, 독립 청원을 통해 항일 독립 의식을 고양하고 전통 문화를 수호하면서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림 세력은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으나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우송하여 파리 장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2) 문학과 예술
 ㄱ. 시대 과제와 일본 통제 :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탄압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후 일제는 모든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조선문인협회, 조선음악과협회, 조선연극협회를 조직하고, 모든 활동을 침략 전쟁과 일제의 식민 통치를 찬양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이와 같은 내용이 아닌 것은 모두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ㄴ. 문학
 1910년대에는 이광수 등의 활동으로 근대 문학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은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 사상, 자유연애의 칭송, 신생 한국의 전망 등을 담은 소설입니다.

 1920년대에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예술성만 추구하고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로 창조(1919)가 있고 폐허(1920), 백조(1922)도 발행하였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습니다. 신경향파 문학은 3.1. 운동 이후 노동자, 농민들이 활발히 조직화되는 추세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순수 예술을 표방하는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문학이 현실과 생활을 반영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한편 프로문학은 극단적인 계급 노선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대중과의 연대성이 약화되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국민 문학 운동을 일으켜 계급주의에 반대하고 문학을 통해 민족주의 이념을 선양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민족 의식과 민족애의 고취, 모국어 사랑, 전통 문화의 부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5, 26),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등이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문학의 분야도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으로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제가 중일 전쟁을 도발하고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시작한 이후 일제는 우리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면서 군국주의 찬양을 강요하였습니다. 이광수, 최남선 등과 같이 일부 문인은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육사, 윤동주 같은 저항 시인의 활동도 활발하였습니다.

 ㄷ. 민족 예술
 음악 부분에서는 1910년대에는 서양 음악에 기반을 두고 창가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국권 피탈 후 학도가, 한양가, 거국가 등 망국민의 슬픔과 일제에 대한 저항적 성격의 노래가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전통 회화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서양식 유화가 새로운 미술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제의 수탈을 비판하는 풍자화도 등장하였습니다. 

 연극은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어느 분야보다 파급 효과가 컸습니다. 3.1 운동 이후 민족 계몽 운동이 확산되자, 동경 유학생들이 극예술 협회를 조직하고 연극 공연을 민중 계몽의 수단으로 삼아 이 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본격적인 근대 연국은 토월회(1923), 극예술연구회(1931)가 조직되어 활동한 이후에 등장하였으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과 강요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연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어를 쓰지 않는 연극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활동은 다른 분야보다 발전이 늦었습니다. 처음 일본 영화의 보조 수단으로 출발하여 한국 영화로 독립하기까지는 자본, 기술, 자재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중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발표한 것은 한국 영화를 획기적으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우리 고유의 향토적인 정서가 은은히 배어 있는 슬픈 가락을 깔고 당시 일제 지배하의 망국의 통분과 슬픔을 자아내는 한편 항일 의식과 애국심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역시 1940년 조선 영화령이 발표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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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대한 모든 정보와 평론, 문화에 대한 모은 감상과 체험, 개인적 경험에 대한 모든 기록을 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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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1년간 학원에서 혹은 혼자서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겸 쓰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경제, 사회적 민족 운동


 1. 경제
 1) 민족 기업 : 일제의 각종 규제로 민족 기업 활동은 큰 회사의 설립보다는 오히려 소규모 공장 건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한국인이 경영한 기업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인 대자본과 경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기업 활동은 경쟁이 심하지 않은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거나, 가내 수공업과 연계를 맺으면서 중소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민족 기업은 순수한 한국인만으로 운영되었으며, 한국인의 기호에 맞게 내구성이 강하고 무게 있는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 유형으로는 지주 출신의 기업인이 지주와 상인의 자본을 모아 대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서민 출신의 상인들이 자본을 모아 대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지주 출신 공장으로는 경성 방직 주식회사가 있고 서민 출신 공장으로는 평양 메리야스 공장이 있습니다.
 한국인 기업 활동이 활발해서인지,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민족 기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 식민 통치 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의 교묘한 탄압으로 해체되거나, 일본인 기업에 흡수, 통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족 기업의 운동은 1920년대에 비하여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ㄱ. 대두 : 일제 강점기에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기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쌀의 반출을 위해 지주를 지원하고, 일본 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농민과 노동자는 소작 쟁의나 노동 쟁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생존권 투쟁이자 경제적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강화해 간 노동자와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킬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초기 노동자, 농민 단체는 지식인이나 자본가, 지주 등도 함께 참여하여 대개 상호 부조직인 계몽적 단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4월에는 최초의 전국적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었고, 노동공제회가 해체된 이후인 1922년 10월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계급적 목표를 분명히 한 조선노동연맹회가 조직되었습니다.
 * 조선노농총동맹(1924. 4) : 전국 260여 개의 노동자, 농민 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여 '철저히 자본가 계급과 투쟁한다.'라는 강령을 내걸었습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전국 노동자, 농민 단체를 거의 망라한 점에서 민중 운동의 큰 진전이었습니다. 다만 계급적 처지와 입장을 달리하는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이 분화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노동자 단체와 농민 단체의 분리를 모색하여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시켰습니다.

 ㄴ. 노동 운동 : 191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아주 적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습니다.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정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태동기(1920~24년) : 초기에는 주로 임금 임하 반대와 임금 인상 요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23년 이후에는 임금 인상 외에도 단체협약권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악질 일본인 감독의 추방, 노동 조건의 개선 등 다양한 요구 조건이 제시되었습니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주로 정미업, 고무업, 양말업 등 비교적 규모가 작은 공장과 공장이 몰려 있던 경기도, 경상남도,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본격화(1925~29년) : 1920년대 후반기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참가 인원도 늘고 파업 지역도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쟁의는 목포 제유공 파업(1925), 영흥 노동자 총파업(1928),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 등입니다.
 * 원산 노동자 총파업 :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1928년 9월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 있던 라이징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총파업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뒤 이 지역의 상급 노동 단체인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절정기(1930~36년경) :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북부 지방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 수도 빠르게 늘어나, 1943년에는 100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더욱 인하하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였으며, 각종 부담금을 강제로 징수하였습니다.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노동쟁의에 대한 통제 또한 크게 강화하였습니다. 일제가 합법적인 운동마저 탄압하자 노동자들은 비합법적 투쟁에 나섰고,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운동이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이었습니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은 서울, 원산, 함흥 등 북부 공업 지대를 비롯하여 신의주, 평양, 마산, 부산 등 전국의 공업 지대를 중심으로 바르게 퍼져 갔습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지는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노동조합은 강제 해산되고, 노동 운동은 잠복기에 들어갔습니다.

 ㄷ. 농민 운동 : 러일 전쟁 후, 일본인은 본격적으로 한국에 건너와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한편,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이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한국인 지주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얻은 부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소직 농민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지주가 물어야 할 지세 부담까지 떠맡았고, 마름의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더욱이 소작인은 1년을 기한으로 하는 소작 계약을 강요당하여 생존권마저 위협받았습니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 의식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소잭 쟁의가 발생하였습니다.

 태동기(1920~24) : 농민 운동은 소작인 조합이 중심이 된 소작농의 대지주 항쟁, 즉 소작 쟁의로 펼쳐졌습니다. 소작 쟁의의 목적은 초기에는 주로 소작료 인하에 있었지만, 1923년경부터는 압도적 다수의 쟁의가 소작권 이동 반대 투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암태도 소작 쟁의와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 소작 쟁의(1924)가 규모가 큰 것입니다.

 본격화(1925~29) : 소작인 조합이 농민 조합으로 개편되어 자작농까지 포함하는 보다 대중적인 조직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농민 운동도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 쟁의만이 아니라 수리 조합 등 일제의 경제적 약탈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아갔습니다. 대표적인 농민 운동은 전남 무안군 자은도 소작 쟁의(1925), 전남 구례 농민의 수리조합 반대 투쟁(1927), 전북 옥구군 이업사 농장 쟁의(1927), 평북 용천군 불이흥업 서선농장 쟁의(1927~31) 등입니다.

 절정기(1930~35) :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 투쟁이었던 농민 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변화와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격렬해져 갔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지도를 받아 조직된 농민조합은 전국적으로 약 80여개나 되었는데, 함경도 지방의 농민조합 운동이 가장 격렬하였습니다. 함남 단천의 항일 농민 폭등(1930), 함남 정평의 항일 농민 시위(1930), 함남 흥원의 항일 시위(1931) 등입니다.
 농민들은 일제 타도, 치안유지법 철폐, 민족 차별 폐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획득 등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부분적이기는 하나 '토지는 경작하는 농민에게'라는 토지 혁명의 슬로건이 등장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2. 사회 변화
 1) 사회적 민족 운동
 ㄱ. 청년 운동 :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에 청년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여러 청년 단체가 전국에서 조직되었습니다. 1920년 12월 116개의 청년단체가 모여 결성한 조선청년연합회는 수양과 계몽의 성격이 강한 단체였습니다. 청년단체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청년들을 각성시켰으며, 야학을 열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들을 가르쳤습니다. 또,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1923년 이후 청년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여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등에 대한 지원에 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 조선청년총동맹(1924) :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된 이후 청년 단체들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었습니다. 이와 같은 청년 운동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 조선청년총동맹이었습니다.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 조선민족 해방운동의 선구자를 강령으로 내건 청년총동맹은 노동, 농민 운동을 지지하는 등 여러 부문 운동에 개입했습니다.

 ㄴ. 학생 운동 : 3.1 운동 뒤 더욱 활성화된 학생 운동은 1923년 2월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조선 학생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또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조직으로는 경성학생연맹, 조선학생 과학연구회 등이 조직되었습니다. 특히 1925년 11월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학생 과학연구회는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6.10 만세운동과 신간회 결성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학교마다 사회주의 독서회, 비밀 결사 등이 조직되어 동맹 휴교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에도 각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ㄷ. 소년 운동 : 청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년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0년 진주 소년회가 조직되면서 소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소년 운동은 천도교 청년회가 소년부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그 후 천도교 소년회로 독립하여 어린이날(1922)을 제정하고 기념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소년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23년에는 전국적인 소년 운동 조직인 소년 운동 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전국적 조직체로서 조선소년연합회(1927)가 조직되어 체계적인 소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방정환, 조철호 등은 소년 운동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애국심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들 사이에 사상과 이념의 대립으로 소년 운동도 분열되었습니다. 더구나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일제가 한국의 청소년 운동을 일체 금지하고 단체를 해산함으로써 청소년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ㄹ. 여성 운동 :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 인식도 높아졌습니다. 1920년대 전반기 전국적으로 여자청년회, 부인회 등 수많은 여성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여성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중심 단체로는 조선여자교육회, 조선여자청년회가 있었으며, 종교 계통으로는 조선여자 기독교청년회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야학, 강연회 등을 통한 문맹 퇴치, 풍습 개량, 지식 계발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었습니다.
 1924년 5월에는 주세죽, 허정숙 등이 조선여성동우회 등을 조직하여 여성 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을 결합시켰습니다. 또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을 하게 되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 운동과 대립, 갈등을 보이다가 양측이 통합하여 근우회를 결성하였습니다.

 ㅁ. 형평 운동 :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습니다. 또 학교입학통지서에서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습니다.
 * 조선형평사(1923) : 백정 출신들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창립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창립 목적은 계급의 타파, 공평한 사회의 건설, 모욕적 칭호의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의 향상, 동지의 화목, 협력, 상조 등에 두었습니다. 조선형평사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백정의 인권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부문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차 힘을 잃어 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분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여전히 백정 출신을 차별하였으며,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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